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작가 May 24. 2022

5월 24일 유기남의 하루

회의 중독자

기남은 지나친 회의 중독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남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에 지나친 회의 중독 문화가 만연해있다. 회사 대부분의 직원은 무의미한 회의를 싫어했고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팀장급 이상 혹은 몇몇의 일반 직원들은 회의를 많이 하는 것이 회사를 발전시키는 행동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 하루 동안 기남은 무려 9번의 회의를 했다. 그중 5번은 기남이 직접 주최한 것이고 4번은 기남이 참여한 회의였다. 한마디로 회의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갔다.

첫 번째 회의는 기남이 출근하자마자 열렸다. 팀장 자리를 맡고 있는 기남은 출근하기 무섭게 회의를 소집했다. 이 첫 번째 회의는 매일 아침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한 것으로 20분이면 끝나는 가벼운 자리였다. 첫 번째 회의는 크게 특이한 것이 없이 끝났다. 

두 번째 회의는 첫 회의 바로 다음으로 열렸다. 어제 퇴근하기 직전 다른 부서에서 회의를 요청했기 때문에 기남은 바로 다른 미팅룸으로 갔다. 얼마 전 부서 간 업무 협의 과정에서 직원들끼리 갈등이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설적인 토론이 오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부서 팀장끼리 만나서 이런저런 것을 협조해주고 이런저런 점을 고쳐달라고 하는 가벼운 회의였다. 특히 기남의 부서와 갈등이 일어난 옆 부서 팀장은 기남의 동기였다. 그래서 둘은 농담도 따먹으면서 가볍게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회의는 팀장끼리만 참여한 회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끝난 앞의 회의와는 다르게 세 번째 회의는 꽤나 무거운 주제로 진행되었다. 하반기에 있을 대형 프로젝트를 앞두고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를 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는 기남의 부서에서 진행하는 것이었기에 기남이 주최했다. 기남은 자신의 부서 직원들 및 같이 협업할 직원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기남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 회의를 싫어하고 있었다. 사실 이 회의에서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전부터 동일한 주제로 논의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회의였다. 오늘의 회의 역시 그러하였다.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기남은 나름대로 결론을 정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보나마다 기남이 이대로 위에 보고하면 또 욕만 먹고 다시 회의를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기남의 네 번째 회의는 바로 세 번째 회의에서 나온 결론을 기남의 바로 위 부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였다. 기남도 오늘 바로 보고할 생각은 없었지만 부장은 기남에게 언제까지 미루기만 할 수는 없으니 바로 자신에게 간단하게 보고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갑자기 기남과 부장의 회의가 잡힌 것이다. 기남의 보고를 받은 부장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부장은 화를 내며 이 일이 왜 아직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느냐며 기남을 혼냈다. 기남을 답답해하던 부장은 바로 다시 회의를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이번 회의에는 자신이 참여해서 단단히 잡고 가겠다고 했다. 기남은 살짝 시계를 봤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남은 부장에게 점심시간 이후에 보자고 했고 부장도 시간을 확인하더니 점심 먹고 바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렇게 점심 이후 다섯 번째 회의가 소집되었다. 오전에 소집되었던 직원들이 모두 똥 씹은 표정으로 미팅룸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오전에 실컷 이야기했던 것이 허무하게 날아간 것도 짜증이 났지만 결국 부장이 와서 정리할 거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했으면 시간 낭비도 안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장이 주최한 이번 회의도 뜬구름 잡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원들은 지쳐갔지만 기남과 부장은 열띤 토론을 통해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아 좋아하고 있었다. 결국 다섯 번째 회의의 결론은 세 번째 회의의 결론보다 약간 더 나아간 정도에서 내려졌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부장은 자신의 생각이 반영된 것 같아 만족해했다. 

여섯 번째 회의는 다섯 번째 회의 바로 다음으로 시작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부장이 나가자 기남이 다른 직원들은 아직 일어나지 말고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부장이 내린 결론을 바탕으로 R&R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계속 참고 있던 기남의 팀원인 창수는 조금 짜증 냈지만 기남은 그를 진정시키며 일단 이것을 짜 놔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남은 미안하다며 회의는 빠르게 30분 만에 끝냈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늘 이 회의만 3시간 넘게 연속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꼈다.

회의가 끝나고 기남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오늘 있었던 내용을 정리했다. 하지만 기남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10분 후 외부 업체와의 미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외부 업체와의 일곱 번째 회의가 시작되었다. 내부 회의는 아니었지만 다음 달 진행할 일에 대해서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 회의에는 오전부터 기남의 거의 모든 회의에 참여한 창수도 들어왔다. 창수 오늘 하루 종일 회의를 하느라 자신의 업무를 전혀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창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외부 업체와의 미팅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감추고 웃으면서 그들을 응대했다. 

일곱 번째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며 기남은 자신이 오늘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다. 기남 나름대로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었는데 창수는 그런 기남을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갔다. 

하지만 기남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운명은 아니었다. 사내 인사팀에서 팀장급들에게 알려줄 내용이 있다며 잠시 회의를 소집했기 때문이었다. 인사팀이 공지하는 내용에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앞으로 연차를 사용하는 방법과 지출결의를 올릴 때 변경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하반기 인사이동이 다음 주에 발표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내용은 보통 다른 회사 같으면 간단하게 공지를 하는 정도에서 끝났을 테지만 기남의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사팀의 팀장이 대표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사팀의 공지를 핑계로 팀장급들의 기강을 잡는 자리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기남도 이런 회사 특유의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인사팀 회의가 끝나고 기남은 다음 주에 보고 예정인 다른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관련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이슈 사항을 체크하고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를 논의했다. 이 회의가 오늘의 마지막 회의인 아홉 번째 회의다. 회의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40분 정도 지나가 있었다. 회의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왜 퇴근 시간 다 되어서 회의를 했는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남은 그런 것은 미안해하지 않았다. 이슈가 생겼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게 기남의 생각이었다. 

기남은 다른 부서 팀장과 논의할 것이 또 생겼기 때문에 열 번째 회의를 할 수도 있었지만 해당 부서 팀장이 이미 퇴근을 한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내일 오전에 바로 회의를 하자고 그에게 요청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기남은 이제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 처리할 업무가 산더미 같았지만 회의를 하느라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남은 짜증 나지 않았다. 수많은 회의를 통해 자신이 회사에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남은 일은 야근하면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오늘 제대로 진행된 건이 별로 없었지만 기남은 오늘은 매우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전 27화 5월 23일 박미혜의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