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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Jun 27. 2022

6월 27일 정예슬의 하루

가장 황당했던 경험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황당했던 경험은 무엇이었어요?”


오늘 회사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나온 대화 주제였다. 얼마 전 회사에서 실제로 황당한 일을 겪은 조대리는 우리에게도 어떤 어이없는 경험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저마다 지금 회사에서 겪은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정말 별 것 아닌 일도 있었고 내가 듣기에도 심각한 일이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바람을 피우다가 응징당한 정과장의 사연이었다. 사건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힌 사연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내 불륜으로 주제가 넘어가는 듯싶었는데 조대리는 나를 지목하며 내가 겪은 황당한 일을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나는 다음에 알려주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조대리는 다음에 꼭 들려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저 웃었다. 겨우 조대리에게서 벗어난 나는 자리로 돌아가 오후 일에 몰두했다. 

잠시의 여유조차 없는 오후 일을 마치고 나는 퇴근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1시간 정도 타야 했다. 지하철에서 나는 다른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 의미 없이 인터넷만 하다가 갑자기 조대리의 질문이 생각났다. 내가 겪은 황당한 경험…. 아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하나 있었다. 황당함을 넘어서 화가 났던 경험이 하나 있었다. 나는 핸드폰에서 예전 메시지를 찾으려고 했다. 내가 찾던 메시지는 거의 1년 전에 온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한참 내리던 나는 마침내 내가 보고 싶었던 메시지를 찾았다.


[정예슬 지원자님께 전합니다. 죄송하지만 회사 측의 사정으로 인해 채용이 취소되었습니다. 어떠한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슬님의 미래에 좋은 일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어이없는 메시지는 1년 전, 내가 입사하기로 되어있던 회사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첫 출근을 하기로 한 당일에 온 메시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던 지하철에서 이 메시지를 받았는데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이대로 회사에 가서 따질까도 생각했다. 어디에 신고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법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당시 나의 황당하고 화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1년 4개월 전, 나는 5년 간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인원을 감축하던 시기였다. 해고라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나는 회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직 젊고 경력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금방 재취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직은 쉽지 않았다. 보통 이직을 준비할 때는 회사를 다니는 상태에서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의지할 회사가 없었다. 지금까지 모은 돈과 퇴직금, 그리고 실업급여가 있어 버틸 수는 있었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면서 자신감도 없어졌다. 돈을 더 이상 쓰기 싫어서 하루 종일 굶은 적도 있었다. 이대로 취업을 못해서 남은 돈으로 연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재취업을 준비한 지 4개월 만에 나를 찾는 회사를 만났다. 이름이 알려진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 캐시카우도 튼튼했고 회사 사람들도 괜찮아 보였다. 연봉은 지난 회사보다는 낮춰야 했지만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회사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단 1번의 면접을 보고 나는 합격에 성공했다. 회사에 대한 확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직장을 잃은 지 4개월 만에 다시 취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연봉을 조율하는 미팅을 하고 취업 날짜까지 확정 지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회사가 나를 입사하는 당일에 해고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았으니 채용 취소였지만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날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고 종점까지 계속 앉아서 갔다. 처음에는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생각도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편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점에 가면 내가 모르는 지역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내가 죽어버리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만 남아있었다. 

종점에 도착한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주위를 걸어 다녔다. 종점이라고 하지만 그곳도 도시였다. 내가 생각하는 시골 같은 풍경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심과는 다른 한적함이 있어 좋은 곳이었다. 나는 근처 카페에 가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켰다. 첫 출근이라 예쁘게 입고 나왔는데 이제는 그런 것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카페에서 커피만 계속 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핸드폰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만 봤다. 누가 보면 실연을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창문 밖으로 노을빛이 보일 때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를 켜고 다시 취업사이트에 접속했다. 원래 지원하고 싶었지만 잠시 취업을 하게 되면서 지원을 못한 회사 리스트를 확인했다. 원래 다 성에 안 차는 회사들이었지만 채용 취소를 한 회사와 비교해보니 당장에라도 지원하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그 회사들에 대한 지원서를 모두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끄려고 하는데 당시 올라온 채용 공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였다. 나는 자기 전에 회사에 지원했고 그 후 1년 동안 지금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이 사연이 바로 내가 점심에 말하지 못한 황당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하자니 나의 궁상맞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이 일을 말할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냥 내 머릿속에 간직할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다. 

만약 조대리가 나에게 황당했던 이야기를 또 묻는다면 나는 그냥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말할 것 같다. 그걸로 내 황당한 이야기는 별 것도 아닌 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실제로 겪은 황당하고 짜증 나는 이야기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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