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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Dec 17. 2022

12월 17일 최영수의 하루

60대의 끝

아침 일찍 일어난 영수는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원래 몸에 열이 많은 영수는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덕분에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산책이 아닌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영수는 공원을 돌았다. 그러나 조금 걸으니 영수는 지쳤다. 영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침부터 러닝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영수는 체력이 조금 더 좋아지게 다음에는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수는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아침 반찬 중에는 며칠 전 며느리가 만들어준 갈비찜도 있었다. 영수는 갈비찜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며칠 지난 갈비찜이라 살이 제법 딱딱해졌다. 씹기가 불편했던 영수는 갈비찜을 내려놨다. 영수의 아내는 그런 영수를 보더니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그러냐고 핀잔을 주었다. 영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침을 다 먹고 영수는 핸드폰으로 영상 통화를 걸었다. 이제 4살이 된 손자와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손자와의 통화는 요새 영수가 살아가는 원동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은 영수의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손자가 몸이 아파서 통화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수는 손자가 크게 걱정이 되었다. 병원을 가봤냐, 약을 먹였냐, 무슨 큰 병이 있는 건 아니냐며 아들과 며느리를 닦달했다. 그러자 영수의 아들은 그냥 가벼운 감기가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영수는 괜히 아들에게 ‘애 잘 챙겨!’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내는 영수에게 손자한테 잘해주는 것처럼 아들 부부한테도 좀 잘해주라며 나무랐다. 영수는 화가 나서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방으로 들어온 영수는 계속 투덜거렸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들 부부와 아내에게 괜히 화만 낸 것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영수는 침대에 누웠다. 방구석에 놔둔 핸드폰이 울렸다. 영수의 친구인 정권의 연락이었다. 정권은 주말인데 뭐하냐며 영수 보고 밥이나 먹자고 했다. 영수는 정권 말고 다른 친구들도 불러주면 나가겠다고 했다. 정권은 다른 애들은 가족들이랑 여행 가서 영수 혼자 있을 것 같아서 연락한 것이라고 했다. 영수는 그 말을 들으니 정권이 괘씸해졌다. 영수는 벌떡 일어나 괜히 정권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방에서 남편이 또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은 영수의 아내는 방 문을 열며 그만 성질부리라고 말했다. 영수는 그 말을 들으니 또 화가 났다. 남편의 다음 말을 예측한 아내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영수는 씩씩거리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아침부터 화만 내니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영수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두통약을 가지러 갔다. 약통에는 영수가 오늘 먹어야 하는 수많은 약들이 있었다. 영수는 약들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하나하나 챙겨 먹기 시작했다. 약의 종류가 너무 많아 다 먹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약을 다 먹은 영수는 TV를 보고 있는 아내에게 가서 점심에 근처에 있는 국숫집에 가자고 했다. 아내는 ‘집에 있는 것이나 먹어’라고 하려다가 그냥 남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영수가 이 이상 성질을 부리면 쓰러질 것 같다는 게 아내의 생각이었다. 

점심시간. 영수와 아내는 국숫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국숫집은 그들의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곳에 있었다. 식당에 도착한 영수는 식당에서 틀어놓은 TV를 보면서 음식을 시켰다. 영수는 아내가 좋아하는 만두도 같이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부부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영수는 계속 TV 뉴스를 보고 있었고 아내는 핸드폰으로 친구들이 보내주는 영상과 기사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국수가 나오자 영수는 빠르게 면을 들이켜려고 하다가 사레가 들렸다. 계속 기침을 하는 남편을 본 아내는 휴지를 꺼내 영수에게 줬다. 영수는 아내가 준 휴지로 입을 가리고 계속 기침했다. 아내는 영수에게 물을 따라서 건넸다. 영수는 물을 마셨지만 그때도 기침을 해서 물이 모두 입 바깥으로 튀었다. 아내는 휴지를 꺼내 자신에게 묻은 물을 닦았다. 영수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힘겹게 식사를 마치고 영수와 아내는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손자의 몸이 괜찮아져서 영상 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영수는 기분이 좋아져서 소파에 앉아 손자와 통화했다. 아내 역시 영수 옆으로 와서 4살이 된 아이의 재롱을 지켜봤다. 부부에게 또 다른 활력이 되는 순간이었다. 영수는 입이 귀에 걸린 상태로 계속 손자를 쳐다봤다. 그렇게 그들은 한 시간이 넘게 손자와 대화했다. 

저녁시간이 되자 아내는 저녁을 차릴지를 물어봤다. 영수는 점심에 국수를 먹어 계속 속이 안 좋은 상태였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수는 저녁은 그냥 챙기지 말자고 했고 아내 역시 동의했다. 저녁 시간 내내 아내는 소파에 앉아 TV를 봤고 영수는 TV를 봤다가 핸드폰을 봤다가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 10시가 되니 영수는 졸리기 시작했다. 영수는 간단히 세수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자신의 서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영수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젊은 날의 영수가 있었다. 책을 읽고 일을 하던 그 시절의 영수. 영수는 은퇴 후에는 서재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하루를 그냥저냥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수는 책들을 만지며 옛 생각에 잠겼다. 영수는 나이가 들었지만 6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그렇게 늙은 나이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력이 떨어져 하루를 버티고 있는 자신이 안타까워졌다. 젊은 날의 패기와 지혜,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영수에게 거의 다 사라졌다. 

아내가 서재로 들어와 영수에게 언제 자냐고 물었다. 영수는 서재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남편의 모습을 본 아내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영수만의 시간을 챙겨주기 위함이었다. 영수는 물끄러미 책을 보며 감상에 잠겼다. 그렇게 올해 69세인 영수의 마지막 60대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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