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통곡 그 후
폭풍 눈물을 쏟아낸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어떤 내용을 쓸지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김영하 작가가 한 말처럼 첫 문장을 일단 시작하고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기를 반복했다. 지난 며칠간 나에게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을, 주변을 들여다보았다. 알맞은 문장을 고민하고 다듬어 나가는 사이 내 안에서 일던 폭풍이 가라앉았다.
완성한 글('그녀가 대성통곡을 한 까닭')을 남편에게 읽어주고 우리는 속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은 해결책이 없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남자들이 다 그럴까? 상당히 궁금하다.) 장남 노릇을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는 해결할 일도 문제 삼을 일도 없지만 느닷없는 통곡 때문인지 읽어준 글 때문인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속상함을 느낀 지점들을 차분히 털어놓았고 듣기 불편했을 하소연을 그는 가만히 들으며 종종 맞장구를 쳐주었다.
명절 때마다 찾아올 이 전투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대장이고 나는 노예 병사일 것이다. 다만 이제 나는 대장 앞에서나마 입을 가진 자, 표정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대장은 내 감정을 더 헤아릴 것이고 나는 대장의 신임을 얻으려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번 전투는 끝났으니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사실 한참 전에 기분이 회복된 덕분이다.
음 그러니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내 안에 잉태된 글감이 마침내 한 편의 글로 탄생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불행한 노예 병사가 아니었다. 이쯤이면 되겠다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발행 버튼을 눌렀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작자로서의 순수한 기쁨이었다. 객관적인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내 안에서 완결성을 띤 이야기로 판정받은 그 글의 창조자가 다름 아닌 나였다. 보상을 주지 않는 며느리 역할 놀이와는 달리, 글쓰기는 쓰는 동안의 즐거움과 완성 후의 기쁨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글은 활자의 단순 나열이 아니다. 사유의 결과물이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 생각을 거듭하고 고운 체로 걸러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오롯이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대체할 수 없고 유일하다. 이 생각을 나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사유하고 글 쓰는 나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실감이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생각하는 나’는 그 자체로 존재의 증명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든 것을 개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체 불가한 존재로서의 지위를 얻기 어려운 모순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능력주의는 개인이 차지한 지위를 모두 각자의 책임으로 돌리고,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선택의 주체가 되지만 선택지가 많다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가죽을 구하는 일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주관했던 중세의 장인이 얻을 수 있었던 만족감과 성취감을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는 노동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창작의 기쁨과 효용이다.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고백이고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글쓰기는 오래전부터 나의 관심사였지만 애정만큼 열정은 따라주지 못했다. 과거 싸이월드에 종종 짧은 일기를 끄적거려 보았으나 그마저도 싸이월드의 쇠락과 함께 길을 잃었다. 그 이후로 쓴 글들은 혼자 보는 글이었다. 창고에 처박아 둔 만들다 만 옷처럼 완성품이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이 공간에 한 편의 글을 올리기까지 나는 중세 장인의 마음이 된다. 바느질을 꼼꼼하게 마무리하고 튀어나온 실밥이 없는지 살핀다. 앞뒤로 돌려보고 안감을 뒤집어도 보고 이만하면 됐겠다 싶을 때 비로소 떨리는 마음으로 ‘발행’을 클릭한다. 그 순간의 기쁨은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의 것이다. (20220203)
*이 글의 제목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건에서 논란이 되었던 구절에서 따왔음을 밝힌다. (정색하며) 물론 내가 알게 된 기쁨은 글쓰기의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