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공원 산책

나 홀로 나무 이야기

by 박기복

비가 올 줄 몰랐는데. 몽촌토성역 1번 출구 계단을 올라서다 당황하고 말았다. 거대한 평화의 탑과 더불어 비 내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실망하며 발길을 돌렸다가 역내 편의점에서 비닐우산을 샀다.


고맙게도 비는 걷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을 유지하며

적당히 내려주었다. 투명한 비닐우산 덕에 탁 트인 시야, 빗방울이 비닐에 부딪치며 내는 잔잔한 소음, 비 오는 날 특유의 먼지 냄새, 지면에 붙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감촉. 맛있는 커피라도 마시는 중이었다면 완벽히 맞아떨어질 오감만족이었지만 이미 네 가지 감각의 자극만으로도 충분했다.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 돌아야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충동적으로 지하철을 탄 거였다. 오래 걷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코어 근육을 의식하면서 바르게 걷는 일이 빼먹지 말고 해야 할 연습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올해는 올림픽공원에 한 달에 한 번은 오겠다 맘먹은 참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도착하기도 전부터 목적지는 나 홀로 나무였다. 관계자들이 정했을 '올림픽공원 9경' 중 하나인 나 홀로 나무는 말 그대로 들판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나무인데 내가 꼽는 올림픽공원의 정수(essence)다. 평범한 나무 한그루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뭔가 시적이랄까.

빗 속 나 홀로 나무의 모습


외로운 나무, 다정한 그늘을 만들어내는 나무, 사계절 홀로 당당한 나무, 배경으로 두고 사진 찍기 좋은 나무, 자태가 아름다운 나무, 이 구역 들판의 독보적인 주인공. 나무는 말이 없지만 날씨나 햇살, 보는 이의 기분에 따라 저 나무는 매번 다른 이야기를 가질 것이다.


어쩌다 들판 위에 홀로 서 있게 되었을까. 저 자리에 나무를 심기로 결정한 사람의 속내가 무엇일까. 저 나무는 혼자 있는 게 괜찮을까. 시선을 받는 게 부끄럽거나 지치지는 않을까. 빗 속에 있는 나무 앞에서 답을 듣지 못할 질문만 던지다가 돌아왔다.


한때 열광하며 보았던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기억에 남는 은서(여주인공)의 대사가 있다.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어.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정든 가족을 떠나며 한 곳에 쭉 뿌리내리며 사는 나무를 언급하던 어린 배우(문근영)의 연기가 훌륭한 탓이었는지 그때부터 종종 사람이 죽어 나무로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저 나무가 부디 평생 주인공을 꿈꾸었으나 단역으로만 살다가 간 연극배우의 후생이라면 좋겠다. 종갓집 맏며느리이자 열두 남매의 어머니로 일평생 식구들을 건사하느라 지쳐 제발 혼자 있고 싶었을 여인이래도 나쁘지 않겠다. 작고 헛된 상상이지만 마음이 흡족해진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202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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