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9년차 명절을 보내고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 꺼이꺼이 소리를 내 울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고 시어머니, 시동생네가 지방에 있는 각자의 집으로 내려가고 가까이 사는 시누이마저 가고 나니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해냈다 같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잘 견뎌냈다는 생각 딱 그 정도. 이렇게 저렇게 뒤섞인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이불, 빨랫감, 남은 음식, 그릇들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집안 가득 차있던 냄새들을 빼고. 마침내 멍때리며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니 억지로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둥둥 떠올랐던 것이다. 분함, 억울함, 서글픔, 무력감 같은 것이.
녹색창을 열고 '명절'과 '며느리'라는 두 단어를 동시에 입력해봤다. 나열된 제목만 훑었을 뿐인데 대한민국 며느리들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면 과장일까. 가부장제가 만들어놓은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허덕이며 신음하는 목소리가 다수였고 부조리, 불공평과 싸우고 있는 '용사'들이 써내려간 격문도 종종 보였다. 더 서글퍼졌다. 나는 절대 용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남자와 부부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할 망정, 가족들과 날을 세우고 불편한 마음을 견디고 축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박 3일간의 명절 가족 모임을 위해 남편과 나는 함께 대청소를 하고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장을 보았다. 식사를 차리고 치우고를 반복하느라, 차례상을 모시느라, 멀리서 온 가족들을 위해 서울 나들이를 계획하고 실행하느라 남편도 나처럼 쉴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 비로소 소파에 누워 리모콘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남편을 보며 드는 나의 감정은 전우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항상 함께였고 둘다 애썼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2박 3일간 여섯 번의 식사를 차리고 치우면서 (또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도 나처럼 지쳤을 테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정신적 보상이 뒤따랐을 것이다. 홀로 되신 후로 더욱 애틋한 어머니와 생각만 해도 마음 한켠 짠하게 만드는 동생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베풀고 싶은 만큼 베풀었다는 만족감이 긍지처럼 가슴 가득 차올랐을 것이다. 어디서든 대장 노릇을 하고 싶어하는 남편은 경제적, 육체적 부담을 고스란히 감당함으로써 진정한 대장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가족회의 의장 임기도 연장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말하자면, 과거 우리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형성된 '장남 노릇'을 기꺼이 수행함으로써 가족 내에서 체면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맞벌이를 해서 함께 번 돈으로 그가 대장 놀이를 하고 있는 동안 나의 서열은 어디였을까? 얼핏 보면 회의같지만 사실은 통보의 자리에서 나는 결정된 사항을 듣고 정해진 답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니 나에게는 발언할 권리나 선택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가부장적 질서가 두드러진 집안에서 출생 순서가 가장 빠른 아들은 가족 내 서열 상위일지 몰라도 며느리는 몇번째 아들의 배우자인가와 관계없이 그저 며느리로서 강요된 노동을 감수할 뿐이다. 보상이 있다면 '노동자'라 칭할텐데 내 경우에는 경제적, 정신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니 '노예'에 가까운 처지랄까. 역사에서는 노예의 신분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편을 통해 신분이 상승하는 사례가 많던데 자유인인 나는 어째서 대장을 만났음에도 (어쩌면 대장을 만났기 때문에) 신분하락을 감수해야 하는가.
어쨌거나 간헐적 노예의 삶을 사는 나는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과 특히 명절에 만큼은 전우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이 각성한 노예가 대장 앞에서 꺼이꺼이 속상함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속사정인 것이다. 대성통곡이 있기 직전 우리는 말없이 소파에 널부러져 있었는데 각자의 침묵은 형태만 같을 뿐 본질은 달랐다. 그의 침묵이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에 맞이하는 느긋한 '이완'이라면, 나의 침묵은 복잡한 심경을 차마 펼치지 못해 말문이 막힌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막힌 말문은 결국 대성통곡의 형태로 터져나왔고 어리둥절한 대장이 등을 쓸어가며 노예를 달래주었다 한들 그들의 처지는 굳건할 것이다. (2022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