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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Sep 05. 2024

분짜의 현지화,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지난 주에 베트남 식당에 갔다. 삼각지와 연남동에서 '핫한' 맛집을 여럿 운영해 온 사장님이 베트남 음식점을 새로 론칭했는데, 그게 우리 동네에도 문을 열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이다. 찾아가니 입구부터 '힙'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가게 하나하나를 'SNS핫 플레이스'로 일궈낸 그의 감각이 이 가게에도 어려 있었다. 해수욕장에서나 볼 법한 접이식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분짜가 주력 메뉴였다. 망설이지 않고 주문했다.


답답해서 직접 만들었다. 비싼 돈 주고 돼지불백에 새싹야채 먹기 싫어서.


말이 끝나자마자 총알처럼 조리가 시작됐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주방이 반쯤 드러나 있어 안에서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순간 철제 그릴로 추정되는 곳에서 불꽃이 훅! 하고 일어났다. 불꽃의 색과 모양을 봤을 때 저건 틀림없는 짚불이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대며 기대감이 폭발했다.


그렇게 10분 뒤에 분짜가 나왔다. 얼핏 본 대로 짚불을 썼다면 높은 확률로 현지에 가까운 분짜를 내놓는 집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이 적중했다. 바싹 구워진 돼지갈비와 완자가 육수에 담겨 있었다. 숯불에 구웠을 때 나오는 그을음이 분짜 육수에 살짝 떠 있었다.


이 집은 맛을 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타협 없이 현지의 맛을 추구하는 곳이다. 서둘러 젓가락을 들어 면을 육수에 풀고 야채를 담가 고기와 함께 건져 먹었다. 입에 넣는 순간 불향이 폭발했다. 느억맘 육수가 품은 감칠맛과 산미, 여기에 향이 가득한 채소의 신선함이 함께 느껴졌다.


여기에 쌀국수까지 함께 먹으니 상추쌈에 고기를 싸 먹는 것처럼 여러 가지 맛이 한꺼번에 폭발했다(이 정도면 그냥 고깃집을 냈어도 훌륭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먹는 내내 박수를 쳤다. 다 먹고 나서도 며칠 동안은 그 집의 분짜가 생각났다. 집에 가는 내내 나는 이 집에 뼈를 묻겠다 다짐했다.


분짜를 시키면 자꾸 불고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보름 뒤 다시 찾아가니 가게는 처음 갔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 근무하던 젊은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 한 분이 주방에 계셨다. 아마 이 분이 가맹점 사장님이었던 것 같다(아마 그때 본 사람은 본사에서 온 매니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달라진 사람들만큼이나 분짜의 맛도 180도 바뀌었다. 제사상의 산적처럼 두꺼워진 돼지갈비는 그릇에 양념 국물이 흥건해질 정도로 덜 익어 있었다. 마치 백반에 올라가는 돼지불고기 같았다. 그릴 밑에서 불타던 짚불도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고기에는 그 어떤 불향도 그을음도 없었다.  


이렇게 익은 갈비를 느억맘 국물에 담으면 불에 구울 때 날아가지 않은 기름이 육수에 둥둥 떠다닐 게 뻔했다. 사장님은 아마 그걸 알고 계셨을 테고, 그래서 느억맘 육수에 돼지갈비를 넣지 않고 따로 냈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시킨 메뉴는 분짜가 아니라 그냥 쌀국수랑 함께 먹는 돼지불고기가 되어버렸다. 본점이 넘겨준 레시피를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음식을 내놓느 전형적인 예시를 눈앞에서 본 것이다.


스언느엉 제대로 할 줄 안다? 당신은 베트남 요리사!


높은 확률로 사장님의 고집은 오래도록 유지될 것이므로 나는 그날 이후 가게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사실 이 가게만이 아니더라도 현지의 레시피대로 분짜를 만드는 곳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앞으로는 그냥 내가 만들어 먹자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집에서 만든 것만 못하면 굳이 사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만드냐고? 그전에 베트남에서 갈비구이가 꽤 중요한 요리라는 걸 말해두고 싶다. 베트남어로 갈비구이는 "스언 느엉(sườn nướng)"이라고 하는데, "스언(sườn)"은 "갈비"를, "느엉(nướng)"은 "구이"를 뜻한다. 한식처럼 양념에 잰 갈비살(또는 돼지 앞다릿살)을 넓적하게 펴 숯불에 바싹 굽는다. 이걸 밥 위에 올리면 갈비덮밥인 껌땀(Cơm tấm), 쌀국수에 곁들이면 분짜, 쌀 바게트에 올리면 샌드위치인 반미가 된다. 갈비 하나만 잘 구워도 베트남 요리 세 개를 동시에 정복할 수 있는 셈이다.      


가정에서 스언 느엉을 만들 때에는 보통 삼겹살이나 돼지 앞다리살을 쓰는데 양념을 만드는 법은 한국의 돼지갈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간장과 설탕 마늘을 쓰는 건 한국과 같으나 샬롯과 레몬그라스 속대를 다져 쓰는 건 다르다. 한국은 양념에 과일을 갈아 쓰는 걸 즐기지만, 베트남은 보통 굴소스와 캐러멜 소스, 원당을 더 많이 쓴다(물론 과일을 쓰는 곳도 있다).


사실 두 요리 모두 맛의 차이가 크지는 않다. 현지의 맛을 완벽히 재현하고 싶다면 모를까, 그냥 집에서 먹는 돼지갈비처럼 양념해도 어색하지 않다.


대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다만 맛있는 분짜를 만들려면 고기만큼은 정말 잘 구워야 한다. 재료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제대로 굽지 못하면 망친 분짜를 보며 꽤 오랫동안 우울해질 수 있다. 먼저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살짝 두르고 약한 불로 천천히 볶듯이 굽는다. 5분쯤 지나면 고기에서 수분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중불로 두고 수분을 날린다는 느낌으로 뒤적인다.

최근에 한 식당에서 먹은 분짜. 고기를 비장탄으로 구웠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 줘야 분짜다. 상추만 있는 건 좀 아쉬웠다.



수분이 반 이상 날아갔다고 느끼는 순간 고기에 캐러멜 소스나 원당을 한 스푼 뿌려준 뒤 가장 강한 불에서 볶는다. 백반집 돼지갈비처럼 타기 직전까지 바싹 굽는 게 포인트다. 이때 토치를 써서 고기 표면을 그을리면 마이야르 작용을 가속화시키면서 불맛을 낼 수 있다(늘 말하지만 불맛과 탄맛은 다르다). 그럴 수 없다면 프라이팬으로 조리하는 대신 예열한 오븐에 넣고 230도로 20분간 굽는 것도 좋다.


찍어먹는 분짜 육수를 만드는 건 훨씬 쉽다. 4인분 기준으로 물 600ml를 냄비에 붓고 백설탕 120ml, 베트남 피시소스인 느억맘 100ml, 쌀식초(현미식초) 90ml를 차례대로 넣고 섞으면 된다. 그 다음 설탕이 다 녹을 정도로만 가열하면 끝이다. 베트남에서는 육수 고명으로 즈어겁이라는 파파야 절임을 넣지만, 그냥 집에 있는 당근을 잘게 다져서 넣어도 괜찮다.


육수 냉장고에 안 넣냐고? 현지에서는 사실 분짜 육수를 미적지근하게 먹는다. 그래야 느억맘 육수의 향이 더 강하게 올라오기 때문. 물론 우리는 냉면의 민족이니까 조금 차게 해서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고 살얼음이 낄 때까지 차게 하면 찍어 먹을 때 고기의 지방이 육수 위에서 굳어버리니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만 식히도록 하자.


잊지 말자 느억맘! 잊지 말자 바싹 구운 갈비!


여기서 포인트는 느억맘인데 조심할 점이 있다. 한글로 번역된 분짜 레시피는 대부분 ‘피시소스’라고만 적어 놓는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마트에서 파는 대부분의 피시소스는 태국식(남플라)이다. 남플라는 느억맘보다 맛도 훨씬 짜고 향도 강하기 때문에 이걸로 분짜를 만들면 높은 확률로 망한다.


해서 느억맘이라는 이름의 베트남 피시소스를 사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게 없다면 분짜는 단념하자. 그래도 걱정 마시길. 이미 한국에 유통 중인 현지제품들이 많다. 특히나 새벽배송을 즐겨 쓰고 있다면 검색부터 구입까지 단 20초도 걸리지 않는다(베트남 식품 대기업인 마산 컨슈머의 제품을 사면 무난하다).      


‘단지 이것 때문에 느억맘을 사야 하나’ 싶은 현타가 온다면, 그 또한 걱정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느억맘의 범용성은 실로 놀라워서 겉절이부터 닭볶음탕까지 거의 모든 한식에 쓸 수 있다. 향이 순하고 염도도 낮아서 한식의 간을 맞추는 데 최적화된 조미료다. 동남아 조미료를 한식에 쓰는 데서 오는 위화감? 단언컨대 전혀 없다.


이렇게 만든 갈비구이와 느억맘 육수에 쌀국수 면과 샐러드 믹스를 곁들이면 현지의 맛에 근접한 분짜가 완성된다(고수나 타이 바질, 민트가 있다면 더더욱 좋다). 아, 하노이 맥주도 한 병 사놓는 것도 잊지 말자.    


어떤 요리든 정체성을 유지한 채 현지화 해야


누군가에게 요리는 원전의 완벽한 구원이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응용과 재창조다. 어느 것이 일방적으로 맞다 말할 순 없다. 다만 현명한 요리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지 적확히 구분할 줄 안다. 특히나 외국음식은 더 그렇다.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보수적인 응용을 해야 요리가 망하지 않는다. 응용이 지나쳐 음식의 정체성을 잡아먹으면 쏨땀(태국 파파야 샐러드)을 양배추 코울슬로처럼 만드는 고든램지 될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분짜의 정체성은 바싹 구운 갈비구이의 불맛과 감칠맛 가득한 느억맘 소스다. 이 정체성을 제대로 지켜주는 분짜를 국내에서도 보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분짜를 곁들임 메뉴로 제공하는 돼지갈비집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면 그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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