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일본식 닭꼬치 ‘야끼토리’를 먹어본 건 초등학생 때였다. 이렇게 말하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셨나 봐요’라는 이야기가 나올 법 하지만, 전혀. 1990년대 초반에 이 신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한 장사꾼의 뛰어난 감각 때문이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시장 앞에서 이불을 떼와 팔았다. 그 시장 한가운데에서 생닭을 파는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이 어느 날부터인가 시장 입구에 좌판을 깔고 닭꼬치를 팔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한 입 크기의 닭다릿살을 나무 꼬치에 꿰어 불판에 구운 뒤 간장 양념을 발라 내놓았다. 돌이켜보면 이 닭꼬치는 지금 길거리에서 파는 그것과도 꽤나 차별적인 것이었다.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썰린 닭다리살의 크기도 그렇고, 고기를 굽는 불판의 형태도 뭔가 좀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불판은 일본의 야키니쿠(일본식 불고기) 전문점에서 쓰는 1인용 가스 불판이었다. 닭다릿살도 일식 술집 이자카야에서 내놓는 시판용 ‘야끼토리’의 크기와 거의 같았다.
요즘 사 먹는 닭꼬치는 그때 그 맛이 안 난다..너무 아저씨 같은가; (게티이미지뱅크)
시골 장터에 나타난 혁신
어느 날 “아저씨 닭꼬치는 왜 이렇게 맛있을까요?”라고 물은 내게 “이거 다 일본에서 직수입한 거라 그래”라고 답했다. 그랬다. 이 아저씨는 1993년 한국의 재래시장에서 현지 이자카야의 시판 닭꼬치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2023년인 지금 돌이켜봐도 그의 장사 안목은 분명 혁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랩을 들여온 것 그 이상으로.
그러니 아저씨의 닭꼬치를 처음 사 먹었을 때 미각적 충격이 적지 않은 건 당연한 인과. 그 나이에 무려 현지의 맛에 가까운 닭꼬치를 먹었으니 말이다. 적당히 불맛을 입힌 닭다릿살에 달달한 간장양념이 더해졌으니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의 조합’그 자체였다. 문득 저녁밥은 다 필요 없고 이걸로만 배를 채우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닭꼬치를 너무 먹어서 저녁밥을 남겼다가 엄청나게 혼난 적도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마카다미아를 먹게 된 다람쥐가 충격에 빠져 멍 하게 서 있는 영상을 SNS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다람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막 아홉 살 된 아이가 불에 구운 닭다릿살을 생전 처음 먹었는데 그게 얼마나 맛있었을까.
그리고 닭꼬치에 중독된 여덟살 어린이
그때부터 나는 한동안 부모님에게 받은 용돈 중 상당 부분을 닭꼬치를 사 먹는데 탕진했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한 중독적 쾌락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언제나 접할 수 있었고,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쾌락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어린아이 입장에서 그 쾌락은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시세로 5백 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지만 닭꼬치 하나가 주는 쾌락에 비하면 아이스크림은 언제든 뒤로 미룰 수 있었다. 자식이 닭꼬치 매대 앞을 서성거리는 걸 알게 된 부모님도 닭꼬치를 매개로 나를 통제했다. 숙제 안 하면 닭꼬치 못 사 먹는다. 밥 남기면 닭꼬치 사 먹을 돈 안 준다. 가끔 아니꼽고 치사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부모님 말씀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아저씨가 시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매일 그 근처를 서성거렸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뒤 그 아저씨가 평소에 뇌전증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아저씨가 평소처럼 닭꼬치를 팔다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 이후로는 시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그 아저씨는 여기 오지 못할 거라고 내게 이야기했다. “아니, 왜! 다 나았으면 나와서 닭꼬치 팔아도 되잖아!” 뇌전증 환자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차별과 선입견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던 내게 그 이유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닭꼬치가 내 인생의 어딘가를 바꿔놨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그날. 나는 몰래 오줌을 싸는 전봇대 뒤에 쭈그려서 울었다(그 시절 화장실에는 어린이용 소변기가 없었다). 이거 먹으려고 숙제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받아쓰기도 90점 맞았는데. 이제는 열심히 살아야 할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인생 10년 차에 겪은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이었다. 그 아저씨의 근황을 걱정하기 시작한 건 머리가 좀 굵어진 뒤였다.
이제는 다 커서 “그때 구워주신 닭꼬치, 정말 맛있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어디서든 행복하게 지내세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지금은 잘 계시려나. 여전히 그가 구워준 닭꼬치의 맛은 내 기억 한 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그가 굽는 닭꼬치만큼은 되야 할 텐데.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며 출근과 퇴근을 견뎌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