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은 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송시열과 허목은 조선 중기 노론과 남인의 영수로서 치열하게 대립했던 정적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여당과 야당의 대표 격인 사람들이었다. 송시열이 병에 걸렸을 때 의술에 밝지만 정적인 허목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아들을 보내 처방을 받아오게 했다. 송시열 아들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허목은 처방을 써줬는데 비상과 극약이 들어있었다. 아들은 걱정이 되어서 극약을 빼고 달여 바쳤는데 병이 낫지를 않고 더욱 위중해졌다. 송시열은 이상하게 여겨 아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화를 내며 다시 허목에게 가서 처방을 받아오게 했다. 송시열이 처방전을 보니 이전과 같이 비상과 극약이 들어 있었다.
허목은 처방에 비상과 극약이 들어 있어서 송시열이 먹지 않을 것을 걱정했으나 송시열은 정적인 허목이 소인배가 아니라고 믿고 처방대로 약을 달여 먹었으며 병이 깔끔하게 나았다. 송시열은 뒷날 허목을 찾아가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한다.
세종은 조선 초기 번영을 이끌었고, 정조는 후기에 ‘조선판 르네상스’를 열었다. 2009년 2월에 정조가 반대파의 중심인물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공개되었다. 약 4년간에 걸쳐 보낸 297 통이었다. 정조가 욕을 하는 대목도 나오고 심환지와 정치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조를 지시하는 부분도 있다. 정조가 편지를 읽은 뒤에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는데도 심환지가 남겨두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편지가 공개되자 정조가 반대파 인물과 짜고 술수를 부리기도 했다는 둥 말이 많았다.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구절을 보고는 정조의 인간적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정조가 반대파의 중심인물이며 독살의 배후 인물로까지 의심받는 심환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 사실을 통해 낮은 수준의 지도자와는 다른 정조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 불통의 권력자는 반대 세력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귀는 닫고, 말도 섞지 않으려 한다. 반면에 정조는 반대 세력의 영수조차 소통 및 공존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국내든 국제사회든 분열과 대립의 시대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차이는 차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상대방 사이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벽을 쌓는다. 심지어 상대(방)를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영어의 라이벌Rival은 강River을 둘러싸고 살아가던 부족이 어원이다. 한 부족이 강에 독약을 풀면 다른 부족은 물론 자신의 부족도 커다란 피해를 받는다. 부족들은 어차피 자신들도 이용할 물이기 때문에 그릇된 욕심이나 적개심에 사로잡혀 독약을 풀 수 없다. 차라리 서로 오염시키지 않고 잘 관리하여 계속 이용하는 편이 낫다. 라이벌은 원래 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라는 함의가 있다. 송시열과 허목, 정조와 심환지는 라이벌이었지만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경쟁 및 공존 대상으로 여겼다. 송시열이 정적인 허목의 비상 및 극약 처방을 순순히 받아들인 일이나 정조가 심환지와 편지로 소통했던 점은 보통사람이라면 흉내 내지 못할 일이었다.
라이벌이 없다면 긴장이 이완되어 실력 및 함량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강력한 라이벌을 가진 운동선수들이 선의의 경쟁의식으로 무장하여 훈련에 매진한 결과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적군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낮잠이나 자러 가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