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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31. 2017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프랭크 캐도건 카우퍼 <무자비한 미녀>


무자비한 미녀(La belle dame sans merci), 1926



선홍색의 화려함이 화면을 압도한다. 


붉은 꽃이 만개한 초록의 풀밭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 풀밭의 꽃과 똑같은 무늬의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탐스러운 금발 머리. 새하얀 두 팔은 하트 모양의 부드러운 선을 그린다. 입가에 은은하게 번진 미소. 우리는 이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붉은 꽃들과, 그 꽃들의 살아있는 화신인 미녀에 시선이 꽂히고 만다. 짙은 꽃향기에 취하듯 그녀에게 홀리는 것이다. 붉디붉은 드레스를 활짝 펼치고 당당히 그림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미녀. 그러나 놓치지 말자. 그녀의 발치 아래 맥없이 누워있는 저 남자. 은빛 갑옷을 잘 차려입었지만 그는 무력하다. 잠에 빠져든 걸까? 글쎄. 남자의 얼굴 위, 거미줄이 오랜 세월을 증명한다. 용맹했던 기사는 누구의 포로가 되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걸까.



그림의 제목이 흥미롭다. '무자비한 미녀'.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여자, 팜므파탈(Femme Fatale)의 다른 말이다. 이 그림을 그린 프랭크 캐도건 카우퍼(Frank Cadogan Cowper)는 '최후의 라파엘 전파' 작가라 불린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영국의 화파로서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라파엘로 이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다. 쉽게 말해, 복고풍 화가들이었달까. 이들은 문학적 소재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카우퍼 역시 마찬가지. 그는 19세기 영국의 시인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시에서 그림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무자비한 미녀>라는 제목의 시다. 그림의 제목과 똑같다.



오, 무슨 번민이 있나요? 갑옷 입은 기사여.



무자비한 미녀는 달콤한 말로 기사를 유혹한다. 자신의 고뇌를 단번에 알아차리고 위로의 손길을 뻗는 아름다운 여자. 어느 남자라도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다. 기사는 자신의 임무도 잊은 채 그녀 곁에 머문다. 



나는 그녀를 말에 태웠고, 그녀는 내 등에 기대어 요정의 노래를 불렀지.
나는 온종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네.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여러 가지 의무, 현실 속의 고통, 머리를 떠나지 않는 고민들. 그 모든 것은 아득히 멀어져 가고. 남자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 거짓말처럼 그 순간이 온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달콤한 풀과 야생꿀과 감로수를 찾아주며 요정의 언어로 말했소. 분명히.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남자는 이제 확신을 얻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여자의 말에 망설임은 흩어졌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이끄는 집으로 따라간다. 그곳에서 여자는 귀와 가슴을 적시는 꿀 같은 말과 손짓으로 남자를 어르듯 잠재운다. 곧 깨어나게 될 단잠이었을까? 남자는 눈을 스르륵 감으며 그것을 의심치 않았다. 





존 키츠의 <무자비한 미녀>는 전설처럼 떠도는 옛이야기를 원전으로 한 시다. 

숲 속에 사는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미녀가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해 그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그녀에게 걸려든 남자들의 원혼은 이승을 떠나지 못해 숲을 떠돈다는 이야기. 카우퍼는 무자비한 미녀가 기사의 생명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먹은 뒤의 모습을 포착했다. 존 키츠의 시에 따르면, 기사는 환각 상태에 빠져들며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깨닫게 된다. 



'무자비한 그녀가 그대를 노예로 삼았구나!'



자신보다 먼저 미녀에게 당한 자들이 기사를 향해 부르짖는다. 그들의 섬뜩한 경고에도 이미 늦어버렸다. 지금 남자는 얼굴 위로 거미줄이 드리워진 줄도 모른 채 창백한 모습으로 영원한 잠에 빠져있다.  여자는 싱싱한 꽃에 둘러 싸여 산뜻한 나날을 즐기는 중이다. 저 불쌍한 포로를 발아래 두고서.



그림 속 붉은 꽃은 양귀비라고 한다. 붉은 양귀비의 꽃말은 "몽상, 위안"이라 전해진다. 


무자비한 미녀의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요'라는 달콤한 말에 속아 

허무한 몽상에 빠졌지만,

기사는 찰나의 순간,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사랑해요'라는 말보다 '진심으로'라는 말에 위안을 얻었으리라.

진심이라는 단어는 묘한 울림을 가졌다. 

우리의 마음속에 꿈처럼 부드러운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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