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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Jan 06. 2019

[단편소설] 오늘의 기억

시간이 결정하겠지.


준희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그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거의 17년 전쯤인 그때는 준희를 -지금은 배우인- 김민희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보니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지금의 준희와 김민희는 거의 비슷한 나이인데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없다.


나는 레스토랑의 입구가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 웨이터가 자리로 안내를 해주고 있지만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을 준비를 한다. 지나온 시간의 폭이 고개를 숙여 인사해야 할지 손을 흔들어 인사해야 할지 헷갈리게 한다. 그녀도 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짓는다. 웨이터와 그녀가 테이블에 도착하고, 웨이터가 의자를 꺼내 준희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손짓으로 알아서 하겠다는 표현을 하고, 웨이터를 보냈다.


“오랜만이다” 준희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흘러간 시간의 폭에 맞는 적절한 인사였다.

“응, 그렇지. 반갑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악수를 한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얼마만에 만나는 거지?” 준희가 물었다.

“아마 우리가 마지막으로 사귀었을 때가 2006년인가 2007년인가 그랬으니까, 거의 12년에서 13년 정도만에 만나는 거네”

“시간이 빠르다. 그렇지?”

“너무 빨라. 그동안 잘 지냈어?” 내가 물었다.

“십년이 넘는 세월인데 그 질문은 좀 성의없는거 아니야?” 준희가 미소를 지었다.


준희와 단지 몇마디 나눴을 뿐인데, 내가 예전에 그녀를 왜 사랑했었는지 생각이 났다. 당당한 태도, 톡 쏘는 말투,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느낌, 김민희를 닮은 예쁘장한 외모. 김민희를 닮은건 아니란걸 오늘 알았지만.


웨이터가 다가와 런치코스로 2명 준비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근데 우리가 같이 파인다이닝을 할 사이는 아니지 않아? 비싸기도 하고. 여긴 너가 내라” 준희가 웃으며 말했다.

“런치라서 등골이 휠 정도 가격은 아니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도 말하고 웃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내 첫사랑이신데 이정도 식사는 해야죠”

“좋아” 준희도 미소지었다. “너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면 돈 크게 쓰는건 여전하네?”

“내가 그랬다고?”


준희는 우리가 사귈 당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기념일이나 생일에는 당시 학생의 용돈으로는 부담을 느낄 수 있는 가격대의 레스토랑을 갔다고 얘기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당시 제일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나의 용돈 범위내에서 데이트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의 식사한 기억을 떠올렸으나 같이 밥 먹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이상하다. 수십수백번 밥을 같이 먹었을텐데.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구립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연신내로 가서 옛날식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를 먹었던 것이다. 준희에게 그 경양식집을 기억하냐고 물었으나 이번엔 그녀가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맛있겠다. 먹자”

에피타이저가 테이블에 놓이자 준희가 말했다. 토마토로 만든 것인데, 나는 요리를 잘 모르는지라 일단 플레이팅에 감탄을 한번 하고 나서 먹기 시작한다.


“아까 그 질문 내가 해볼게. 너는 그동안 잘 지냈어?” 토마토 요리를 한입 입에 넣은 준희가 말했다.

“그거 되게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까 말문이 막혔어”

“1분만 시간을 줘. 그동안의 세월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고 얘기할게” 나는 토마토 요리를 먹으며 생각했다.

두번째 요리인 방어요리가 나왔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돌아보니깐 정말 따분한 인생이다” 나는 2009년 인턴으로 시작한 회사에 취직을 하고, 두번의 이직을 한 일, 지금의 회사에 취직한 계기, 그간의 연애들, 몇번의 여행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통의 인생이네”

“나는 내 인생의 주연이니까 그 순간들은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금 멀리 떨어진 느낌으로 바라보면서 요약하니까 별거 없네”

“그게 진짜 인생이지. 대부분의 사람 인생은 별로 특별한게 없잖아. 미디어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데서 특별한 사람들이 보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사람들이 진짜로 많다면 미디어나 SNS에서 이슈 자체가 안될거야”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네 차례야” 내가 말했다.

“너 내 얘기 전해 들은거 있었어?”

“6~7년 전쯤에 결혼했고, 아이도 한 명 있다. 최근에 이혼했다. 이 정도?”

“많이 아네. 이혼은 모를 줄 알았는데”

“기환이가 얘기하더라고”

나는 담담하게 다음 코스로 나온 닭과 계란으로 된 요리를 한입 먹었다.


준희는 나와 헤어진 후 만난 남자와 2년 정도 교제하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2년 뒤에는 아이가 태어났고, 또 2년 뒤에는 이혼했다고 했다. 지금은 이혼한지 1년이 조금 덜 됐단다. 준희는 자신이 이혼할 거라고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남편의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어느 날 이 사람이 완전한 타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같이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지금은 워킹맘이고.


“오늘 아이는 어디있어?” 내가 물었다.

“엄마한테 약속있다고 하고 밤까지 봐달라고 했어”

“일하랴 애 키우랴 쉽진 않겠다”

“쉽지 않지.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벌인 일들 내가 수습하고 사는 거지”

메인요리인 오리요리가 나왔다.


“근데 나한테 왜 연락했어? 시간도 많이 흘렀는데.” 내가 말했다.

“너랑 헤어지고 나서 전 남편과 연애하고 결혼하면서 생각했던게 있어. 나중에 지훈이에게는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 연락 한번 해봐야겠다고”

“그래? 왜…?”

“우리가 어릴 때 엄청 헤어졌다 만났다를 자주 했잖아. 티격태격 많이 하고, 불필요한 감정소모도 많았고. 그런게 나를 많이 성장시켰더라고. 너와의 관계속에서 배운 것도 있고. 그래서 전 남편과 연애할 때 인격적으로 성숙한 상태에서 연애를 할 수 있었어. 그리고 결혼까지 하게 되니까 너한테 고마운 생각까지 들더라고. 너를 만나기 전 다듬어지지 않은 나였다면 아마 그 사람과 결혼까지 가진 못했을 것 같거든. 결국엔 이혼을 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연락해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지”

 

“그랬구나. 듣고 나니 고맙네. 그런데 나는 너가 만나자고까지 할 줄은 몰랐어” 내가 말했다.

“너가 만나고 싶어하는 눈치길래 만나자고 한거야”

“내가?”

“응. 너가 주말엔 뭐하냐고 물었잖아? 이건 기억나지?”

“기억나지”

“그래서 내가 주말엔 여유있다고 같이 식사할까 라고 물었고” 준희가 말했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 점심이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주말에 뭐하냐고 물은 것이 준희를 만나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할말을 찾다보니 한 말일 뿐이다. 준희가 나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해석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도 나의 마음속 어딘가 준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떠본 것일 수도 있다. 뭐든 어떤가.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 상황이 싫지도 않다.


“너는 나한테 고마운 감정 같은게 있어?” 준희가 물었다.

“응, 물론 있지. 그런데 그게 너한테 100%의 고마움이라기 보다,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들 모두에게 느끼는 고마움을 다 합쳐서 100이라고 치면 그 중에 너에게 느끼는 고마움도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나는 너와 길고 다사다난한 연애를 포함해서 새롭게 연애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거든. 지금은 역대 최고로 괜찮은 사람이지”

“이해는 되는데, 살짝 자존심도 상하네?” 준희는 오리요리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래도 다행히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디저트로 딸기 셔벗이 나왔다.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어?” 준희가 물었다.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는지 묻는 거야?”

“뭐든. 너가 표현하고 싶은대로 말해봐. 듣고 싶어”

“그걸 오늘 나에게 듣고 싶다라…”

“10년도 훨씬 넘어서 만났으니 이런거 물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아?”


나는 딸기 셔벗을 한입 먹고, 의자 등받이에 기댄채 팔짱을 끼고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앞으로 고쳐 앉아 테이블에 팔짱을 낀채로 팔을 걸치고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른 테이블과 웨이터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너는 나에게 ‘처음’으로 기억되는 사람이야”

“느낌이 좋다. 계속 이야기해줘”

“너는 내가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첫번째 사람이야. 사랑의 상처를 남긴 것도 너가 처음이지. 첫 키스도, 첫 섹스도 다 너가 처음이지. 여자친구와 여행 간 것도 너가 처음이고. 첫 이별도 너와 처음,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는 것도 너가 처음이었지. 콘돔을 쓰지 않고 섹스한 것도 너가 처음이었고”

진지하게 듣던 준희는 콘돔 대목에서 웃었다. “그건 나도 생각나. 내가 진짜 안전한 날이라고 했는데도 너가 정말 망설였잖아.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하면 콘돔을 안쓸까 생각한다던데, 얘는 왜이러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 준희가 말했다.


“너 나한테 생리할 때가 됐는데 안해서 걱정이라고 농담했던거 생각나?” 내가 재미있는게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 설마. 내가 그런걸로 농담했으려고?”

“아니야. 진짜야. 너가 전화로 그랬었다고. 그래서 내가 엄청 심각해지니까 너가 크게 웃으면서 뻥이라고 했었다고”

“그래, 알았어. 미안해” 준희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나 또 하나의 ‘처음’이 생각났어”

“뭔데?” 준희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내가 양다리의 대상이 됐던거”

“너 그거 안 잊었구나? 너랑 잠깐 헤어졌을 때 짧게 만난 남자였잖아. 널 계속 좋아하고 있다는걸 깨달아서 그 과정 중에 양다리 기간이 불가피하게 있었던거야”

“그 때 너가 했던 대사도 기억나. 내가 널 세컨 남친으로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래? 였지. 아마?”

“그럴리가. 내 기억엔 난 걔도 좋고, 너도 좋아. 너만 좋다면 너와도 만나고 싶어. 널 잃기 싫어. 정도였는데”

“각자 편한대로 기억하고 있구나” 나는 큭큭 웃었다.


“그래도 그 남자 금방 정리하고, 너가 다시 퍼스트 됐잖아” 준희가 말했다.

“그래 고맙다”

“그 후로 양다리의 대상이 또 된적은 없었어?”

“한번 더 있었어. 내가 되게 양다리 걸치고 싶게 하는 스타일 인가봐” 내가 말했다.

준희와 나는 함께 웃었다.



딸기 셔벗 다음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오늘 남은 시간은 뭐해?” 내가 물었다.

“너 만나는거 외에는 다른 계획은 없어. 엄마가 밤까지 아이도 봐준다고 했으니까…글쎄… 오랜만에 여유 좀 즐기다가 들어가려고”

“그럼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그러자”

우리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가로수길 쪽으로 계획없이 걸음을 옮겼다.


“근데 처음으로 기억된다는 그 말 생각할수록 좋다. 뿌듯함도 있고, 승리감도 있어” 준희가 말했다.

“어떤 면에서?”

“말 그대로 처음이라는 점에서. 너가 누구와 무얼하든 첫 경험은 다 나와 있었던 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

“오늘도 너에게 처음인 일을 만들어서, 또 하나의 ‘처음’을 기억에 남겨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처음’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거지”

“이제와서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나는 장난스럽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우리 여기 들렸다 갈래?” 걸음을 멈춘 준희가 왼쪽의 부티크 호텔을 가리키며 물었다.

“호텔?”

“왜? 싫어?”

“아니, 그냥 갑작스러워서”

“너 솔직히 오늘 나 만나서 섹스하는 상상 했었지?” 준희가 물었다.

“했었지. 근데 그건 상상이니까”


“나는 아까 너가 레스토랑에서 첫키스, 첫 섹스, 콘돔 이야기 할 때 너랑 잤던 기억들이 떠올랐어. 그리고 오늘 너랑 섹스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준희가 말했다.

“나도 그 때 너와 잤던 때가 생각났었지. 근데 오늘 꼭 너랑 섹스하고 싶었던건 아니야”

“너 전 여친이면서 결혼했다가 이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 사람이랑 섹스한적 있어?”

“없어”

“그럼 그것도 내가 처음이네. 가자”

“아…이래도 되나” 나는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준희를 따라 어쩔 수 없다는 모양새로 호텔로 들어갔지만 바지속에서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체크인 후 방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키스를 했다.

“오랜만이다” 내가 말했다.

“오랜만이지” 준희가 말했다.

“나 바로 하고 싶어” 내가 말했다.

“망설이던 사람 맞아?”

“정말이야. 바로 하고 싶어” 나는 이미 단단해져 있다.

“항상 애무부터 하던 애가 달라졌네. 뭐, 좋아. 나도 젖어오고 있었거든”


그랬었나. 내가 항상 애무부터 했었나. 생각해보니 준희와의 섹스가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건 우리가 섹스를 한 사이라는 것 정도다. 나는 그녀를 안아서 몇 발짝 이동해 책상위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내 가방에서 콘돔을 꺼냈다.

“너 콘돔 가졌왔었어?”

“응, 혹시 몰라서. 그리고 난 쓰던 것만 쓰잖아”

“역시 넌 오늘 나랑 섹스를 하고 싶었던거야. 나를 만나고 싶어할 때부터 그랬던거야. 파이다이닝을 간 것도 다 나랑 섹스할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지” 준희가 씨익 웃었다.


나는 준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녀의 치마와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나도 바지와 속옷을 벗었다. 다른 옷을 모두 벗는데 시간을 더 쓰고 싶지 않아 이대로 섹스를 하기로 한다. 준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닌척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연락이 왔을 때부터 그녀와의 섹스를 원했을 수도 있다.


“나 오늘 안전한 날인데” 콘돔의 비닐을 벗기는데 준희가 말했다.

“그 때 그 농담은 또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말했다.

“내가 그런 농담을 했을리가 없는데”

콘돔을 씌우고 준희를 마주봤다. 그녀의 다리를 열었다. 그리고 준희의 몸으로 들어갔다.


우리 둘에게서 조용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다리가 내 허리를 감았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몸을 숙여 입을 맞춘다. 준희의 검은 눈동자를 본다. 그리고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또 10년 정도가 지나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준희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글쎄, 그건 시간이 결정하겠지” 나는 그녀에게 깊숙이 들어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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