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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덕 Jun 27. 2022

감정, 스멀스멀 올라오다 왈칵!


감정이란 어디에서 연유할까?

오늘은 내면의 깊숙한 지하실에 갇혀 그럭저럭 지내던 감정 하나가 급발진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친정아버지 생신이 다음 달이다.

1937년에 태어난 아버지는 팔순을 훌쩍 넘기셨고 아흔에 좀 더 가까워지셨다. 친정에는 함께 찍은 변변한 가족사진 하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려, 이번에 식사하러 모이는 김에 가족사진을 찍자며 남동생과 톡을 마치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엄마가 무언가를 자꾸 따지고 묻는 걸 중재하기 위해 전화를 주셨다. 엄마는 셈이 빠르고 목표의식이 뚜렷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엄마의 성격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나는 고스란히 그 포화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살가운 대화를 해보지도 못했고, 채찍을 든 주인에게 꼼짝없이 순종해야 하는 경주마처럼 그렇게 자랐다.


오늘도 나는 참 억울했다. 그런 우기기 대장 엄마를 잠재우는 건 누구도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전화 너머로 엄마의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소리를 나는 짐작으로 알아들었다. 법 없어도 살아가실 양반인 아버지는 그 문제를 잘 중재하고 싶으셨고, 늘 그렇듯이 그 바램은 오늘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악다구니와 함께 급하게 전화를 끊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친정 엄마와 사이좋게 잘 지내는 딸들은 어떤 기분일까?






나의 심리적인 문제는 삼십 대 중반부터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속내를 잘 말하지 않던 나는 마음이 아프면 혼자 삯이거나 기억에서 삭제해 버리는 식으로 감정을 처리해 왔는데, 아이가 생기고 집에서 육아를 하면서 그 처리 과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면에 버려졌던 감정의 뭉테기들이 솟아올라 나를 턱턱 숨 막히게 했다. 여리고 예쁜 내 아이한테 친정 엄마처럼 악다구니를 부리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감정이란 과거의 켜켜의 산물이다. 무언가 경험한 순간 외부의 존재에 되비친 어떤 기억들은 감정을 낳는다. 환경에서 학습된 감정은 또 다른 경험으로 강화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감정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어디엔가 구겨 넣어두면, 무의식 속에 똬리를 튼다.


오랜 기간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든 감정을 피하는 "방어 기제"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고착되면 자동적인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먼저 나의 근원적 문제들을 알아야 했다. 치유 세미나를 찾아 들으며 억압된 심리들을 하나씩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나의 방어 기제는 주로 "억압"과 "이상화" "통제"등이었다. 이제 무엇엔가 감정이 부딪힐 때마다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찾아내려 갔다. 그 근원은 "수치심"이었는데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거나, 남들이 그렇게 볼 것 같다는 생각이 수시로 나를 침범해 들었던 것이다.


나를 흔드는 감정을 만날 때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본 덕분에 이제는 그 자동적인 감정 회로를 어느 정도 벗어났다. 인식하는 데 5년, 어느 정도 치유하는데 5년, 거기서 벗어나는 데 5년쯤·····. 똑떨어지게 말할 수 없지만 "자가 치유"의 과정으로 얼추 그 정도의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나의 내면은 치유되었지만, 감정이 없어진 건 아니다. 어린 날 육체적·언어적 폭력을 가했던 엄마를 용서했지만, 엄마의 그런 모습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그때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했고, 커서는 그에 대응하는 내가 우스워질까 봐 참았다. 그래서는 안되는 거였다는 걸 깨달았지만 노모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아직도 엄마와 마주하는 시간이 곤혹스럽다.



그래서 오늘은 당황스런 전화가 끝나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나를 위로했다. 한동안 마음이 치유되고는 쓰린 마음에 눈물을 흘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그냥 좀 울기로 했다. 가슴 가운데서 파르르 올라오는 기운을 조용히 응시하며 토닥여 주었다. 전화 통화를 들었던 남편은 잠시 곁에 와 앉았다가 혼자 있게 해 주었다.


스멀스멀 올라온 감정을 왈칵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일렁이게 놓아두었다가 사그라들 때까지 지켜봐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마음의 감옥을 탈출하겠다는 희망으로 지난한 치유의 과정을 혼자서 헤쳐나갔던 지난 시간들. 이제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살면서 아픈 감정은 다시 찾아오겠지만 기꺼이 받아내고 흘려보낼 방법을 알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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