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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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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03. 2022

단서

2019








은해는 혼자 벤치에 앉아있는 주연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서글픈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혼자서 주연을 응시하고 있을 때면 늘 그런 기분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런 기분에 잠겨있는 자신이 좋다고 느꼈었다.


“여기서 뭐해?”

“기다리고 있어.”

“누굴?”


주연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 디지털 카메라 주인. 직사각형의 은색 카메라를 소중한 제 일부라도 되는 양 두 손에 고스란히 안 듯이 들고 있는 주연의 모습은, 처음 보는 분위기였다.


이젠 그런 기분 따위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지 못해서, 마음을 잡아끄는 개성도 없어서. 그래서 늘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밝아도 뭐해. 수많은 불빛에 결국은 가려지잖아. 보름달을 올려다본 은해는, 그 빛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밤을 보내는 자신이 늘 안타까웠다. 그런 마음이었다.








야트막한 경사가 있는 공원, 달보다 가로등 불빛이 더 환한 밤이었다. 줄넘기를 하는 사람, 운동기구에서 허리를 돌리고 있는 사람, 철봉을 잡고 턱걸이를 하는 사람, 음악을 틀어놓고 춤 연습을 하는 사람 등, 제각기 다른 사연만큼이나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은해는 주연이 아니었으면 공원에는 올 일이 없었다. 이런 곳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이 공원을 꽤 많은 주민들이 이렇게 즐겨 찾는다는 것도 몰랐다. 주위를 둘러본 은해는 신기해했다. 작지만 농구코트도 있고, 정자도 있고, 작은 놀이터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네. 다시 주연을 바라보았다.


제가 여기로 오게 만든 마음의 나침반, 발걸음을 향하게 만드는 표지판, 단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제 일상의 주인공.


“언제 여기 이 벤치에 놓여 있던 걸 주웠어.”


주연은 얘기를 시작할 때면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리며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은해는 고개를 숙여가며 주연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남의 걸 보는 건 안 되니까… 절대 안 보려고 했는데. 누구 건지 찾아줘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본 거야.”


그래, 너는 그렇게 항상 남을 배려하려고 애쓰는 애니까. 너무 배려하느라 자기가 얼마나 좋은 앤지도 모를 정도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신의 영역도 견고하게 지키는 그 부드러운 치밀함.


“…근데 사진을 보다 보니까… 이 카메라 주인이 누군지 너무너무 궁금해졌어.”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응.”


매일 이 시각에 나와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고 간다는 주연의 미소는 ‘기다림’이란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는 티끌만큼도 담겨있지 않은, 이해하기 어려운 순수함이 있었다.


반대편으로 고갤 돌리고 몰래 한숨을 쉰 은해는 다시 주연을 흘긋 쳐다보곤, 용기 내어 벤치에 앉았다.


“그럼 내가 같이 있어줄게.”


주연은 아마 평생을 가도 모를 터였다. 그 때 제가 얼마나 큰 용기를 끌어 모아야 했는지. 그 보잘 것 없는 일에.


“정말?”

“혼자 있으려면 심심할 거 아냐.”


어차피 집에 바로 가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너랑 있으면 더 좋지. 그림처럼 그린 듯한 옆얼굴에 대고 속으로 속삭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마음은 지구와 달 사이처럼 멀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 본 건 학원 복도에서, 서로 책을 안은 채 다른 방으로 가느라 지나칠 때였다. 몇 걸음 앞에서 걸어오는 주연을 보고 은해는 잠시 놀라 멍해있었다. 처음 학원에 간 날이었다. 같은 그룹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는 이름도 몰랐던 주연과 친해지고 싶었다.


같은 그룹이 되자 너무 기쁜 마음에 주연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곤 했었다. 낯을 가리지만 일부러 더 친근하고 편하게 굴려고 애썼다. 그런 저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주연이 그저 조용한 앤 줄만 알았지.


“주연아, 너 향수 뿌려?”

“아니…?”


나만 느꼈나. 너한테서 좋은 향기 난 것 같은데.


은해는 주연에게 작은 향수를 선물했고, 주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받았지만 그 향수를 뿌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간 후회에 싸여있었다. 난 정말 바보 같아. 너무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좀 더 빨리 가까워졌을 텐데.


이제는 주연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기분을 느끼는 걸 좋아하는지, 벌써 다 알고 있었다. 속독하듯이 주연을 읽으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렇게 다 읽어내면, 주연을 대하는 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건 제 마음이었다. 고집투성이. 다른 방향이나 이름은 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고장 난 화살표. 결국은 주연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그 날 밤.


소리 없이 다가온 슬픔을 느낀, 가을의 향기 물씬한 늦은 밤. 은해는 제 일상의 주인공은 주연인데 왜 주인이 되지는 못하는지 생각하다가 먹먹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상가와 아파트 단지를 지나 공원까지 걸어오는 데는 십오 분 정도가 걸렸다. 여기서 주연의 집까지는 십 분 거리라고 했다. 은해는 주연이 왜 매일 여기에 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수고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여길 매일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이 안 오면, 만약 온다고 해도 다른 시간대에만 와서 엇갈리는 거라면. 그럼 어떡해?”


그렇게 말했지만 혹시 주연이 제 말에 기분 나빠할까 걱정하며 그를 살폈다.


“그러네….”


목소리는 조금 쓸쓸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냥…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은가봐.”


주연은 잘도 웃었다. 원래 그렇게 자주 웃지 않았는데. 이곳만 오면, 이토록 깊이 물든 밤만 되면, 주연의 웃음을 시시콜콜하게 볼 수 있었다.


은해는 왠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 그 말만은, 진심으로.


그냥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주연의 목소리를 들으면, 닿을 수도 없는 달을 걷는 느낌이라고 은해는 생각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더욱 생생하고 꿈결 같은 느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스스로 영영 알 수 없을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오래도록 알려주고 싶지 않은 심술이 생겨났다.


그래서 듣기만 했었다. 주연이 그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넘기며 보여주었다. 마치 제 카메라인 양 사진을 보여주고 얘기를 덧붙이는 모습이 무척 즐거워보였다. 은해는 더욱 심술이 나서 입을 꽁하게 다문 채로 사진만 보았지만, 주연이 왜 그 사진들이 좋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어느 화창한 낮 입바람으로 비눗방울을 불며 까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 정자에 나란히 앉아 부채질을 하는 할머니들의 뒷모습, 일찍 떨어진 낙엽의 곁에 은은하게 생긴 무지갯빛, 슈퍼 앞 게임기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게임을 하는 아이들, 더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낡은 기찻길의 고즈넉한 풍경, 끝없이 푸른 바다의 끝에 꼿꼿이 서있는 붉은 등대와 방파제…… 그리고 그 앞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낯선 사람의 정다운 미소.


카메라 주인의 사진을 본 순간, 은해는 주연이 어쩌면 이 사진 속의 사람에게 반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 사진 속의 사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정감을 가진 이였으니까.


그 사진들을 바라보는 주연의 모습에서, 주연을 바라보는 제 모습이 보이는 듯해 은해는 코끝과 목안이 매웠다. 길에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 소리가 아프게 느껴졌다. 너무 차갑고 날카롭고 다정하지 않고. 도저히 붙잡아둘 수 없는.


“이 카메라, 좀 오래된 것 같은데. 충전식이네?”

“그래서 충전기를 따로 구했어. 오래된 건데도 작동을 잘하는 거 보니까 관리를 엄청 잘했나봐.”

“…….”

“나도 잘 관리해서, 멀쩡하게 돌려줘야지.”


그렇게 타인의 무언가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 세상에 존재한다면, 더는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확인하지도 확인받지도 않을 마음들은 깊고 깊어져서, 이토록 찬란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테다.


“은해야.”


중간 지점인 횡단보도 사거리에서 주연은 처음으로 은해의 한 손을 잡고 말했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고마울 필요가 없는 마음인데도 고마워하는, 주연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혼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났다.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는 주연에게 은해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좋겠네, 비꼬기도 싫었고. 그래서? 이제 와 관심 없다는 척하기도 싫었지만. 참았던 마음이 흘러넘치는 데는 막을 손이 부족했다. 마음이 하나인 것도 슬픈데 왜 손은 두 개뿐일까.


내가 왜 너랑 같이 있고 싶었겠어?


그 말을 들은 주연의 표정이 무슨 의미로 일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주연은 제게 영영 잃어버린 색 하나가 될 지도 몰랐다. 그런 작은 향기와 상처가 추억으로 남은 가을이었다.



 





“여기서 뭐해?”


은해는 어두운 정자에 앉은 자신을 찾아온 주연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고약한 배려가 이기심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제게 늘 빛나는 주인공이니까.


“그냥 있어.”


널 좋아하면 나는 아프니까, 네가 보고 싶어도 내 안에 있는 네가 아프게 느껴져서 아프니까, 보고 싶지 않았는데.


왜 너는, 생각을 여민 은해는 제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주연은 성큼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그 사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있다 가는 자리였다. 만약 누군가 우리를 찍어준다면 그 사진에서 우리는 어떤 느낌을 보여줄까? 자신은 주연을 보는데 주연은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지는 게 싫었다.


그 사이 주연이 제게 더 가까이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혼자 있기 심심하겠네.”

“…….”

“같이 있어줄까?”


속삭이듯 말하는 주연의 얼굴이 반달처럼 빛과 그림자가 나뉘어있었다. 은해는 어느 쪽이든 어루만지고 싶었다. 생각한 그대로 손이 뻗어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주연에게서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너… 향수 뿌렸어?”


주연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응, 네가 준 거잖아.”


제가 무심코 내준 단서에서, 주연도 자신을 읽어주었을까. 그제야 눈을 맞춘 순간에는 어떤 말도 욕심도 필요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대로 함께 달을 걷는 서로의 소리를 듣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고, 좋아하는 만큼 더 좋아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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