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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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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n 23. 2022

여우비

2017








잠깐이라더니 세찬 빗줄기가 십 분이나 넘게 하늘에서 내리쳤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던 길, 온몸이 홀딱 젖어 버렸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왔다. 돌아간 자리에 크로스백을 안쪽으로 맨 채로 서있는 사람이 보였다. 세찬 빗줄기에 시야가 흐릿해 얼굴을 분간하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디디는 뛰어오는 소망을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눈길을 주고 있었다. 홀딱 젖어 속이 비치는 교복에 동그란 안경은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히고 상아색 컨버스는 진흙으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소용없어진 안경을 벗어 가방 앞주머니에 넣은 소망은 차들만 쌩쌩 지나가는 도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섰다. 아마 가방 속에 든 책들도 다 젖어버렸을 것이다. 컨버스 속 발이 젖은 느낌이 찝찝해서 인상을 썼다.


“갑자기 비가 오고 난리야, 그치?”

“잠깐인데 뭐.”

“잠깐이래도, 비가 오는 건 싫어. 갑자기 오는 건 더 싫고.”


소망은 비가 오면 못 하는 게 많아져서 싫다고 했던 적이 있다. 자전거도 못 타고, 자유롭게 팔을 뻗고 걸어 다닐 수도 없고, 편한 슬립온을 신을 수도 없고, 옥상에 빨래를 널어놓지도 못하고, 하늘을 시원하게 올려다볼 수도 없다고. 하여간 불평불만만 가득해서는―언제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질 거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했었다. 디디는 그 입술에서 어떤 못된 말만 나오더라도 듣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도 못 참냐.”

“응?”

“…아냐.”


만날 부정적인 말만 하고, 불평불만에, 참을성도 없는 게 뭐가 좋다고 붙어 다녔을까.


꼭 굵지도 얇지도 않은 펜선으로 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그림도 그런 정갈하고 단출한 색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계속 바라봐도 좋은 이유는. 사람도 질릴 때가 있다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 아마 오래도록 함께 해도 질리지 않는 건 제게 하나뿐일 테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적고, 생각이 많은 사람은 말이 적다는 건 조잡한 생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선 그게 통했다.


깊고 숱한 생각만큼 말로 꺼내서 보여줬더라면, 땅에 꽂히듯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우울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희고도 뿌연 구름들 사이로 작고 동그랗게 빛나고 있는 해를 가리키면서 소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디도 시선을 깊은 눈동자에서 그 손끝에 닿은 곳으로 옮겨 고개를 들었다.


자주 만날 수 있는 날씨는 아니었다. 저렇게 신기해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상해. 분명 해가 쨍쨍한데 비가 계속 내려. 소나기가 아닌가봐.”

“여우비.”

“응?”

“이런 걸 여우비라고 해. 몰라?”

“그래? 처음 들어보는데.”


소망은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빗줄기가 톡 톡 떨어지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언제는 싫다고 툴툴거리더니 이젠 좋다고 웃고 있냐. 디디의 말에 고개를 획 돌린 소망은 쏘아보는 눈빛을 지어내곤 픽 웃었다.


“신기하다. 뭔가 딴 세상에 온 기분이야.”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고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소망의 옆에서 디디는 비가 오래도록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심통 난 표정으로 도랑을 발로 차니 제게 빗물이 튀자 소망이 짜증을 냈다. 그렇게라도 제게 시선을 잡아둔 디디가 살며시 젖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는 잠깐뿐이야. 지나가면 금방 잊어버릴 거야. 비가 왔는지 무슨 냄새가 났는지 얼마나 젖어있었는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소망에게 디디는 가끔 이렇게 이해 못 할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언제나 제게 닿은 듯 닿지 않고 스쳐간 듯 바라보는 눈빛이 머무를 때도.


디디가 말했다.


“그러니까 잘 기억해두라고.”


소망은 하도 고개를 들고 있었더니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잦아드는 빗줄기 사이로 말했다.

 

“뭘 기억하라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난 그래, 다신 못 할 일이나 소중한 일은 기억해둘 거야.”


그걸 모르는 이유는 네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겠지.


“지금이 바로 그럴 때야.”


실없이 웃으며 젖은 머리를 헝클어뜨린 디디 때문에 소망은 눈을 감았다 떴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햇살만 내리쬐고 있었다. 세상이 밝아졌지만 물내음은 오래도록 콧등을 스치며 맴돌았다. 안경을 썼지만 디디의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발길을 돌려서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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