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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 Sep 04. 2022

내다 버린 약, 내다 버린 시간들

적당히 덜 된 내 인생을 달래가며, 공황을 데리고 살기로 했다.

한동안 책상 서랍 제일 아랫 칸에는 한 봉지 그득 담긴 약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황장애라는 진단명 자체를 믿지 않았을뿐더러, 평소 약 자체에 대한 불신도 컸기 때문에 처방받아 온 약을 먹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다. 


고작 이 약 몇 알갱이들이 뭘 어쩌겠어? 고작 이게 내 마음을 조절해줄 수 있다고?
흥! 난 안 믿어! 날 뭘 안다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지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다 내다 버릴래.


그렇게 몇 달 동안 약을 서랍에 보관만 하고, 째려보기만 하다가 결국 ‘한 알’도 먹지 않고 나중에 모두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동시에 그 기간 동안의 내 삶도 함께 버려졌다. 약의 도움이라도 받았으면 조금 나았으려나. 당시에는 약에 대한 개똥철학인지, 자존심인지, 불신인지 모를 마음으로 약 없이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쌩으로 상황들을 이겨내려니 소모되는 에너지들이 너무 많았다. 육아는 육아대로, 일은 일대로. 엄마이자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 서있다 보니 하루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 하더라도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중간중간 서랍 속 약을 볼 때면 슬퍼지기도 했다.


이렇게 말짱하게 일상생활을 다 하는데 이게 공황이라고? 설마.


엄마라는 자리를 묵묵하게 지켜내기 위해 버티고 버텼다. 짬짬이 울고, 때로는 수시로 울고, 최대한 가끔씩만 무너지려고 했다. 그 마저도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어 겨우 숨어 혼자만의 고통 속에서 빨리 빠져나와지기만을 기다렸다. 엄마라면, 어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신기하게도 현재, 기억에서 일부 사라졌다. 물론 극한 몇몇 장면들, 힘들었던 순간들은 남아있지만, 반면 일상에서의 나의 모습들, 평범한 시간들의 나의 모습들은 기억을 꺼내려해 봐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불안이 일상을 삼킨 기분. 억울하기는 하다. 그 누구보다 긍정적 마인드 컨트롤에 능하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내가 무너져버린 것 같아서 속상했다. 나의 의지만으로 제어할 수 없었던 내 삶의 일부 시간들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약 6개월 이후가 되니 상황은 호전되었고 1년이 지나자 공황 증세도 거의 사라졌다. 몸의 상황은 체감될 정도로 좋아졌고, 과호흡의 빈도나 주기도 점점 잦아들어 걱정할만한 수준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완벽하게 극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약의 도움 없이 점차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불현듯, 또 힘든 상황을 마주하는 상상이 나도 모르게 들 때면 두려움과 전조 증상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정도 느낌은 피할 수 없다면 데리고 살기로 했다. 


뇌가 알아서 내 기억들과 시간들을 내다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또 비슷한 상황이, 똑똑- 원치 않게 나를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간 시간을 부여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덜 된 나를. 덜 된 공황증을 적당히 잊고, 적당히 인정하며, '공황'이라는 아이를, '나'를 적당히 잘 데리고 살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한 번 바꾸면 새 차를 사는 것처럼 교환, 환불이 되지 않는다. 적당하게 중고차먀낭 고쳐가며, 달래 가며  쓰는 거란다. 적당히 덜 된 공황을 달래가며, 덜 된 내 인생을 우쭈쭈 해가며 살아야지 뭐 어째. 내다 버린 시간만큼 나를 다독이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해가며 고쳐 쓰고, 간간히 웃고, 그러다 잊고. 그러다 보면 시간도 지나 가져 있겠지. 


덜 된 공황을 끌어안고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먹고 놀고 쉬고 자고- 웃고 울고- 인정하고 버리고 내려놓고- 털어놓고 쓰고 정리하고. 인생 뭐 있나. 


이 글은 긴가민가 공황을 겪은. 덜 된 어른이의 미성숙하고, 지극히도 평범한 고군분투 일상 극복기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수도, 현재 진행형일 수도 있는 긴가민가 덜 된 공황증- 을 덜어내고, 그 녀석을 데리고 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     



<반창고 문장> 여러분의 마음에 문장으로 반창고를 붙여드립니다.


적당히 덜 된 공황을 달래가며, 덜 된 내 인생을 달래 가며 살아보자.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이고 낮이고 호숫가에 조용히 찰싹이는 물결 소리가 들리니.
찻길 위에서나 잿빛 보도 위에 서 있을 때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들리니.
-W.B.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The Lake isle of innis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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