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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일의 썸머 Jul 09. 2020

이웃나라에서 늦깍이 학생이 되다

세상에 어디 쉬운게 있던가?

기숙사 반배정을 받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다시 학생이 되다 


학교다닐 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절대 아니였다. 그러니 좋은 성적이 나올리 만무했다. 지원한 고등학교는 시험을 쳐서 커트라인을 넘어야만 입학이 가능한 학교였는데, 그래도 지역에서 제일 성적이 높은 고등학교에 지원해서 입학을 했지만, 기본 이상으로 하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 하지 않았던 큰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였지만, 어려운 교과목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악착같이 공부해야겠다는 의욕도 없었다. 


대학을 진학해서도, 선후배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이 청춘의 낭만이라 생각하며 날이 좋으면 좋은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공부를 소홀히 했던 학생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학창시절 내내, 그 모든 시간을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똑똑하게 그 시간들을 쓰지 못했다는 후회는 든다. 


오랜동안 회사생활 후에, 비록 어학연수지만 다시 학생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 뿌듯함과 설레임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책가방을 메고, 일정시간 수업을 듣고, 예습과 복습을 꾸준하게 하고,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도 열심히 하면서 공부에 집중해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더 없는 기쁨이였다. 학교다닐 때는, 예습이 뭔지, 복습이 뭔지 그리고 과제를 생각할 때면 한숨이 나오기 일쑤였지만, 어학연수를 가서는 정말 착실한 학생이 되고 싶었다. 


공부에 그렇게 집중하지 못했던 학창시절은 나를 우등생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각과 결석 한번 하지 않은 모나지 않은 학생이였다. 하지만 어학연수를 하면서 다시 학생이 되어서는 우등생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었고, 우등생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는 어찌보면 자율적 선택이 아닌 당연히 해야하는 필수코수로 간주되어 아무런 큰 고민없이 진학을 한 것인데, 비교적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로 선택한 어학연수는 그 어떤 선택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런 까닭인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때문에 그 시간들을 소홀히 보낼 수 없었고, 정말 알차게 농밀한 시간들로 꾹꾹 채워넣어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수업시간


아직도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한 대학교 캠퍼스에서 첫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느꼈던 설레임은 잊을 수 없다. 회사다닐 때는 지각하지 않도록 겨우 눈을 떠서 이끌려가듯 출근했었는데, 어학연수의 개강 첫날에는 새로운 시작의 설레임에 새벽에 눈을 떠서 아침밥까지 꼬박 챙겨먹고 갔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작은 교실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물론 우리반의 경우, 한국인 학생이 40%의 높은 비율로 구성이 되었지만, 그건 그렇게 문제가 되지않았다. 그냥 나에게는 다양한 국적의 반친구들과 함께 소통을 해보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으니까. 


그러나 모두가 어려보였다. 한국 학생들의 경우는 교환환생인 경우가 많았고, 태국, 라오스와 같은 동남아에서 온 친구들은 그들의 조부모 혹은 부모님이 중화권의 배경을 가진 이유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러 왔다. 이때 우리반에서 제일 어린 친구는 라오스에서 온 17살 소녀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에게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들은 말은, 


"그래, 너 나이에는 다들 회사에서 일하고 있겠지"라는 한 마디였다. 사실 일리있는 말이여서, 그 말을 부정하거나 토를 달지는 못했다. 나같이 한창 일할 나이에, 적지않은 급여를 포기하고 일을 그만두고 뜬금없이 중국어를 배우겠다며 어학연수를 떠나진 않을 것이다. 


어린 친구들 틈에서, 혼자 우뚝 선 나이가 어색한 건 사실이였으니까. 사실 서울에서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과연 이 선택은 잘 한건인가?를 몇번씩이나 되뇌기도 했었으니, 개강 첫날 느꼈던 설레임뒤에는 앞으로 일년을 이 낯선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남은 시간은 내가 계획한대로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 기분좋은 이유가 되어주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에 기름붓기와 같은 기분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2인 1실입니다


당분간은 일정한 수입없이 지출만 계속될 예정이였기 때문에,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였고, 나에게는 다른 옵션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력적이여서 별다른 고민없이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을 선택했다. 다만 문제는 2인 1실의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였다. 


어학연수를 가기전에 학교 기숙가의 조건 등에 대해서 모두 숙지하고 갔기 때문에, 2인 1실을 쓰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없었지만, 낯선 누군가와 함께 같은 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늦깍이로 다시 학생이 되었던 것과 한국과 가까이 있는 나라이지만, 중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살아보았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후회없는 결정이였다. 다만 단 한가지, 기숙사에서 살았던 경험은 그 일년의 기간동안 최악의 시간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선 이와 함께 방을 공유했던 것 역시,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으니 이것도 이젠 낭만의 추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첫 학기의 같은 방에 배정된 룸메이트는 대학교 2학년되는 앳된 한국 소녀였다. 한참 어린 이 룸메이트와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바램은 며칠을 가지 못했는데, 처음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2층 침대구조였다. 그러나 이 친구는 기숙사 2층 침대에서 영 적응을 하지 못한 이유로 방을 변경하기를 원했다. 학교에서는 방 배정을 받은 이후로, 방을 변경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주는데, 이렇게 첫 학기에 만난 첫 룸메이트와는 이별을 하고 두번째 한국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낯선 땅에서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같은 방을 쓰게 된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크게 싸우기부터 했으니, 앞으로 남은 날들이 끔찍해질 확률은 높아져갔다. 그리고 방을 바꿀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모두 사용했으니 다시 방을 바꿀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첫학기에 마주한 기숙사방


대학때부터 혼자 자취생활을 해서, 오랫동안 혼자 사는 것에 익숙했고, 회사생활에서는 까칠한 이과장님으로 통할정도였으니, 이 모든 것들이 남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에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회사를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당분간은 수입없이 지출만 해야하는 상황인데 어떤 불편한 상황은 일정부분 감내해야만 했기에, 2인 1실의 기숙사 생활도 잘 할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거기에 덧붙여 다시 학생의 신분이 된다는 설레임이 더해져, 기숙사 생활의 낭만같은 것도 기대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룸메이트와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그리고 매학기마다 다양한 국적의 많은 학생들이 사용하는 기숙사 환경은 그렇게 좋지 못했기에, 한국에 깨끗하고 안락한 내 방과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 안락함을 포기하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겠다고 중국까지 왔는데, 하루 중 기숙사를 벗어나 수업받으러 가는 길이 가장 행복했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때가 가장 불행했다. 그러다 어쩌다 룸메이트가 방에 들어오지 않는 날 또한 행복했다. 


친한 친구 한 명이 '이제 우리는 힘들게 여행하면 병이 날꺼야, 아마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속에는 이젠 우리는 더 이상 젊지않아서 우리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그렇게 애둘러서 표현을 한 것인데, 그만큼 몸을 편안하게 해줄만한 주머니 사정도 철없던 젊은 날보다는 넉넉해졌으니 굳이 몸 피곤하게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 


뭐 아직도 여행을 하면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서 지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지만, 사실 그 친구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이해한다. 그런데 2인 1실에서 며칠을 지내보지도 않았는데, 예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왜 그렇게 마음깊이 더 공감하게 되던지. 학생이 된다는 낭만에 젖어 기숙사생활의 어려움을 간과하고 2인1실 선택을 했던 것이 큰 잘못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어이 중국에 일년동안 머무르는 선택을 하기까지 정말 쉽지 않은 여정이였는데, 2인 1실의 기숙사 생활은 중국생활의 시작점에서부터 맞딱드린 힘든 문제가 되었다. 


그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 하나 쉬운 게 있었던가?




[매거진의 다른 글]

1화. 어느새 서른후반, 전환점이 필요했다

2화. 늦은 시작이란 있는 것인가?

3화. 12년 회사생활, 나는 과장이였다

4화. '퇴사'를 위한 단 한가지의 마음가짐

5화. 퇴사 후, 새로운 언어를 배웁니다

7화. 인생의 고민은 나만 짊어진건 아니였다

8화. 퇴사 후 떠났던 어학연수에서 마주한 또다른 무게

9화. 퇴사를 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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