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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일의 썸머 Jul 11. 2020

인생의 고민은 나만 짊어진건 아니였다

그러니 조금 덜 힘들어해도 괜찮다

세상밖으로 나가지않았다면 만들수 없었던 행복했던 시간들 @ 캄보디아




아무도 내 나이가 몇이냐고 묻지 않았다


중국어를 배우겠다고 어학연수를 와서 배정받았던 반에서는 혼자 우뚝 선 나이였기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학교 이외의 곳에서 여가활동을 함으로써 중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기에 그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반의 한국인들은 거의 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온 터라, 나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났는데, 서로 나이를 알아볼 수 있는 한국인 특유의 예민한 감각의 발동으로 내가 굳이 나이를 밝히지 않더라도, '같은 반의 학생' 이상으로 친해지기 힘든 점이 있었다. 예전보다는 사정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는 나이로 인한 서열적인 인간관관계가 만들어지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중국어를 배우는 것에 열중을 했고, 그 외의 시간에는 여가활동을 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집중했다. 중국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으로 올때부터 부산스럽게 챙겨온 배드민턴 라켓이였다. 


중국에 있는 일년동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주말마다 배드민턴 동호회에 참여했는데, 이 동호회의 특징은 중화권 사람들과 중화권 이외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3:7정도 된다는 것으로, 이것때문에 다양한 국적의 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한국에 귀국한 이후에도 중국에서 함께 즐겁게 보낸 애뜻한 시간들이 더해져 여전히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는 평생에 남을 좋은 친구들도 만들었다.


일년동안 이용했던 체육관


한번 맺어지기 시작한 인간관계는 가지치기를 하듯, 계속해서 새롭고 좋은 친구들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중국으로 오기전에 적지않은 나이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어떤식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든 상관없이,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은 나이에 대한 어떠한 거부감과 부담감을 주지않았고, 심지어는 한참 친해진 이후에도 내 나이가 몇이냐고 묻지않았다. 배드민턴을 치는 것 이외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도 친구들은 나이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더 재미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지에 집중했다. 그러니 서로의 나이가 그다지 궁금하고 우선적인 일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에 와서 맺은 인간관계에서는, 너와 나의 코드가 맞다면, 그리고 함께 있을 때 즐겁기만 하다면, 언제나 나를 환영해주었다. 굳이 먼저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빼놓지 않았다. 서로가 있어야지만 즐거운 시간을 함께 만들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피어나기 시작한 '나'라는 사람에 대한 나의 평가는 점점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느꼈던 나이에 대한 압박감을, 문화가 다른 곳에 와서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만 조금은 쓸씁하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나이의 부담감을 벗어나,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고마워해야하는 것이지만, 왜 그 전에는 그렇게도 나이의 압박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작게 생각한 것인지, 그것때문에 힘들어 한 그 당시의 내가 안쓰러워진다.


퇴사를 한 결정적 이유는 매달 정기적으로 통장에 입금되는 돈보다는, 그 당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한 것이 가장 컸었는데, 그렇게 마음이 지쳤던 이유에는 나이가 주는 사회적 의미도 무시하지 못했다. 


이뤄놓은 것 없이 모든면에서 내 인생이 저물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업에 실패해서 큰 금전적 손해를 본 것도 아니고, 중요한 시험에 낙방한 것도 아니였지만,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더 이상 어떻게 손써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크게 자리잡았다. 많은 시간을 일에 몰두하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쥔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인생이 저물어가고 시점에 당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해서 살아가기에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조건들이 너무나도 켜켜히 쌓여, '나'라는 사람을 잘 볼 수 없었다. 하루종일 '나'라는 사람과 붙어있으면서도, 보고 싶은 '나'라는 사람을 볼 수 없었고, 별볼일 없는 인생낙오자, 실패자라는 생각이 더해져,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할 우울로 이어졌다.




친구에게 전한 나의 이야기


친해진 친구들과 중국을 벗어나 캄보디아와 같은 해외 여행지, 그리고 황산과 같은 중국의 유명지도 함께 다녀왔다. 배드민턴이 우리들 만남의 시작이였지만, 거의 일주일에 몇번씩 봐야하는 사이로 발전했고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 학교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먼 거리의 여행을 함께 다녀왔으니, 그 시간들이 아직까지도 우리가 꾸준히 연락하면서 안부를 물으며 지내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되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나이도 알게 되고, 지금까지 각자의 나라에서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나에 대해 궁금해한 것은, 한창 일을 해야하는 나이에 어떻게 중국에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는가하는 부분이다. 그 질문앞에 내놓은 대답은 매번 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하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야. 중국어 배우는 것도 재미있고, 그래서 고심끝에 상하이에 오게 되었지."


사실 표면적으로 봤을때는 거짓이 한톨 들어가지 않는 진실이였다. 하지만 저 두 문장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꺼내놓지 않은 이야기가 더 크고 많았음은 물론이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지금도 간간히 받는 질문이 있다. 회사 그만두고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셨냐고.


더군다나 우리 부모님은 "회사다니면서 돈 모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모으고, 나중을 대비해야한다"고 말씀하신 일평생을 열심히 일해오신 분들인데,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을 다녀와야겠다던 나이많은 딸이 왜 걱정이 되지 않으셨을까 생각되지만, 내 결정에 대해 압박을 주시거나 부담을 주는 말씀은 왠만하면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내가 그 선택을 하기까지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나는 그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어학연수 당시, 친해진 인도 친구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스코틀랜드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 상하이에 건너와 이 거대한 국제도시의 역동적 흐름속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였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날이였는데, 이 날은 어떻게 마음속에 박혀있던 이야기들을 꺼내게 되었다. 


"실은 내가 중국오기 전에 많이 아팠어. 그 아팠다는게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힘들었거든. 그런 마음상태는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고, 일년정도 계속 지속되었지. 그렇게 아픈 마음을 꾸겨잡고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하는데, 그 생활들이 너무 지옥같은거야. 

괜히 부모님도 미워지더라. 인생은 한번뿐인데, 왜 이렇게 매일을 지옥같이 보내야하는지, 그 지옥을 왜 내가 맛봐야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 그 일년중에 제일 힘들었던 일이,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였어. 또 어떻게 지옥같은 하루를 보내야하는지 그 걱정이 제일 컸거든.

지금까지 인생에서 하나도 이뤄놓은게 없는 것 같은데,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시간은 흘러서 내리막으로 내려가야 할 나이가 된 것 같아 무섭고 두려웠어.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나에 대해 혹은 내 인생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댓가를 지금 누리고 있다는 거였어. 지금까지 모든 것은 내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였지만, 진정 내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였던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진지하게 긴 시간을 두고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던거야. 결국엔 회사를 그만두고,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고 했던 것이 바로 상하이에 오는거였어"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였던 점은, 퇴사를 결심하고 상하이로 오기위해 준비하는 과정 이전에, 힘들었던 마음들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부단히 노력해도 안정되지 않았던 마음들을 추스리고 상하이로 올 수 있어서, 이 시간들을 더욱 더 나에 대해 집중해서 소비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떨 때 행복한 것인지, 또 어떨 때 기분이 좋은 것인지 예민한 감각으로 나를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당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일년을 넘게 파랗게 멍들었던 내 안의 모든 감각들이, 회복되는 것을 넘어서 긍정적으로 나를 생각할 수 있게 한 씨앗을 심는 시간들로 채울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알고 있다. 일확천금의 돈을 사용해도 치유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결과적으로 마음이 치유된 시간들은 퇴사를 결심하고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한 선택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이다. 누군가에 이끌려가듯 해서 한 선택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만들어낸 선택은 마음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는 씨앗을 뿌린 것이다. 작은 결정이라도 긍적적인 피드백을 기대하는 선택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선택의 힘을 기르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국적은 다르지만, 사는 이야기는 다르지 않더라


상하이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한 가지 느낀게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교에 진학하고, 그 다음에는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를 갖고, 그 다음에는 좋은 집과 차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일, 유독 한국에만 해당되는 일인줄 알았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헬조선'이라는 것이 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좀 더 쉽게 이해갈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문제, 우리나라의 문제만이 아니였던 것이다. 아시아권 나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서양 친구들까지 그런 고민들을 하는 걸 보고, 내 고민과 문제가 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런 보편적인 것이였다. 그렇다고 안고있는 고민과 문제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겠지만, 국적이 다르더라도 너와 내가 하는 고민은 충분히 공감될 수 있고, 사람사는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것. 


어떤 성장의 배경을 가지고 있든, 물론 어느 나라, 문화에서 성장했는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고민들로 힘들어하고 애쓰기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상하이에서 일년을 지내면서 느낀 점이다. 


인도 친구들은 적당한 나이가 되면 부모님께 결혼의 압박을 받는다는 것과, 중국인 친구들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가 애쓸뿐 아니라, 한국 여느 부모님과 다르지 않게, 그들의 부모에게도 압력이 느낄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친한 중국인 친구는 부모님이 자꾸 선을 보라고 해서, 불만이라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그것이 아니라는 푸념과 함께 말이다. 유럽과 미국인 친구들도 적당한 나이에 결혼과 집의 크기 혹은 자신의 커리어로 많은 고민들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얼마나 자기답게 풀어갈 수 있냐는 방법과 의지의 문제인 것이고, 이것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에 처해있지만 누군가는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것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도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를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먼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해답속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가슴속에 삶을 특별히 행복하고 순수하게 짓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쪽을 향해 매진하십시오.

그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커다한 신뢰로 맞아들이도록 하세요. 그것들이 당신의 의지에서 나올 때, 즉 당신의 내면의 어떤 욕구에서 나올 때에는 그것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세요.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 


당장 풀 수 없었던 문제에 답을 구하지 못함이 결국 자신이 어리석다 생각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다. 낯선 나라에서 일년을 지내보자는 생각으로 쉽지않은 퇴사를 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나'라는 사람을 낙오자, 실패자라는 생각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고, 퇴사를 하고 삶의 방식을 바꿔보는 두려움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않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였는데,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통해서 나는 좀 더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시간안에서 두려움에 맞서는 힘이 조금은 길러진 것 같다. 


어떻게보면, 나는 괜한 마음으로 중국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떠한 조건에 있든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을 한번 경험에 보기 위함이였던 것을, 두렵지만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기 위해 한발짝 내딛어보는 행동을 해본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도 어떻게 설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만들수 있을까하고 조금은 설레이는 마음을 곁들여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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