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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고지 휴게소

by 서효봉

해루는 캐리어에 게임기와 만화책 그리고 천체 망원경을 챙겨 넣었다. 더불어 강아지 제리의 옷과 간식도 캐리어 한쪽 구석에 쑤셔 넣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들렸다.

“해루야, 정리하랬더니! 이렇게 엉망으로 넣어놓으면 나중에 꺼내기 힘들어.”

“에이, 어차피 다 꺼낼 건데 괜찮아.”

“안, 괜찮거든. 다시!”

엄마가 다시! 를 외치면 이제 기회가 한번 남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방심해 장해루! 라는 풀네임을 듣는 순간이 온다면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엄마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니까.

캐리어를 다시 열어 아빠의 양말과 엄마의 화장품을 정리해 공간을 확보했다. 게임기, 만화책, 망원경, 간식 그러고 나니 자리가 없다. 제리, 미안. 안타깝지만 그냥 벗고 다니렴. 너도 그게 좋잖아?

다음 날 해루네 가족은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제주도에 세 번 왔고, 이번이 네 번째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여기가 공항인지 시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서둘러 짐을 찾은 후 렌터카를 빌려 공항을 빠져나왔다. 차 밀리는 제주시를 벗어나 숙소로 잡은 교래자연휴양림에 도착. 날이 어두워져 휴양림 주차장도 깜깜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겨우 주차 후 체크인. 한 달 전 예약한 제주식 초가집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오는 길에 산 회와 매운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뜬 해루는 아빠와 함께 휴양림 주변에 있는 곶자왈 숲을 걸었다. 해루는 매번 제주에 올 때마다 이 숙소에 묵었는데 지난번엔 숲에서 뱀을 만나 기절할 뻔했다. 그래선지 제주의 숲에선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긴장되었다.

산책을 마치고 아침을 먹은 해루네는 오늘 한라산 주변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 가볍게 어승생악에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서귀포 자연휴양림 앞을 지날 무렵부터 안개가 심해져 분위기가 묘했다. 엄마가 아빠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해루 아빠, 운전 괜찮겠어? 여기 안개가 너무 심한데?”

“심하긴 심하다. 귀신 나오겠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어디서 잠깐 쉴까?”

“그래, 바쁜 것도 없는데 저기 휴게소 잠시 들렀다 가지 뭐.”

1100고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시며 안개가 걷히길 기다렸다. 그때 해루의 내장들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화장실로. 이렇게 높은 곳에서 거사를 치를 줄이야.

뒷일을 마친 해루는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근데, 엄마와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차에도 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해루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고, 숲에서 뱀을 만났을 때보다 더 놀라 주변을 뛰어다녔다.

그때 주차장에 서 있던 파란색 경차에서 남자 외국인이 내려 해루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해루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외국인 남자가 한국말을 하니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도 어른 아닌가?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엄마, 아빠가 없어졌어요.”

“뭐? 언제?”

“조금 전까지 저기 휴게소 건물 안에 있었는데 화장실 간 사이에”

“잠깐 어디 가신 거 아닐까?”

“저만 두고요?”

미카는 해루를 데리고 휴게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일단은 같이 한번 기다려보고 1시간이 지나도 오시지 않으면 경찰에 연락해보자고 했다. 해루는 미카라는 그 외국인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아 일단 같이 기다리기로 했다.

“아저씨는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나? 난 영국에서 왔어.”

“영국이요?”

“그래, 넌 몇 살이야?”

“11살요. 아저씨는요?”

“난 110살.”

“네?”

“장난 아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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