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야 정해진 공간이고 도서관도 거기서 거기라 카페를 갈 때만 신중하게 선택한다. 개인 카페라면 주인의 눈치가 없는 곳이어야 하며,
프랜차이즈라면 넓고 조용한 곳이어야 좋다.
무엇보다 편안한 높이의 의자와 노트북을 펼치기에 적당한 테이블, 따뜻한 창가 그리고 질리지 않는 음악이라면 제격이다.
그동안 내게 합격한 몇 곳을 소개하자면,
번지수로 이름을 지은 CAFE 6번지, 182번지, 130번지 그리고 프랜차이즈로 파스쿠찌, 스타벅스. 폴바셋이다. 지역은 서울에서부터 판교까지 여러 곳으로 분포되어 있다.
며칠 전, 글쓰기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분주하다.수강생 작품집의 표지를 만들고 제본까지 끝마치니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진다. 출발하기 전까지 1시간 반 정도 여유가 생겨 서둘러 카페로 향했다. 요즘 뜸했던 스타벅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코 끝을 스치는 진한 향이 느껴졌다. 그 향을 따라 페퍼민트 한 잔을 주문하고 곧 노트북을 열었다.
예전에 쓴 글을 꺼냈다. 한 문장은 잘 다듬어졌고, 유독 한 단어는 애매하게 뭉개졌다. 한참 키보드를 튕기고 있는데, 마구마구 파고드는 소음에 머리가 아파온다.
남자 직원은 내가 건넨 컵을 보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갸우뚱한다. 그 표정이 고스란히 내 눈으로 배달되었다.
이걸 어떻게...
나는 생각지도 않은 표정과 말에는 언제나 어리둥절한다. 아니 스타벅스대기업에서이건 또 무슨 현상일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직원에게 비슷한 표정을 돌려줬다.
"아니... 이거... 이거 어쩌라는 건가요.."
나는 어리둥절을 넘어 이제 약간 뾰족한 말을 찾고 있는 중이다. 우선 잘못한 게 있는지 되돌아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반하장이다.
테이크 아웃 해달라고요!
남자는 이번에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고는 컵 안을 들여다보며 내용물을 둥글게 둥글게 굴리고 있다.
"아니... 커피를 다 드시고... 테이크 아웃을...요?"
"네에???"
아 어이없음, 할 말 잃음, 이제 알겠다. 이 남자의 태도가 왜 이런지.
"이거 커피 아니고 페퍼민트예요."
남자의 볼은 여드름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곧 등을 앞으로 숙여며 이런 말을 한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이게 뭐 그냥 커피 다 마신 컵에 물 담은 건 줄 알고... 색깔이 연해서...
이걸 테이크아웃 해달하고 하시니까 저는 ··· 정말···"
아~ 그럼 지금 이걸, 물로 보신 거예요?
나와 그 남자는 각자의 어깨를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날 어찌 봤길래 저런 말을 하는지 무시당한 기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 누가 물을 테이크 아웃 해요."
불필요한 말을 부연으로 덧대고 허둥대는 인사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정말 죄송했는지 컵에는 따뜻한 민트차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 물이라니, 무턱대고 물이라니 뭘로 봐서 물이야 그럼 나도 물?
'물'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이 심리는 뭘까.'물로 보다'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주로 음료 광고에서 부각이 된 '물'이야기는 사전에 관용구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우리는 상대가 하찮게 보일 때, 자신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을 때 자주 죄 없는 '물'을 거론한다. 투명하기 때문에 안이 훤히 보인다고 속 없는 한량으로도 비유한다.
'물'에 대한 잔소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때론 술자리까지 등장한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물 먹었다' 하고, 상대를 골탕 먹이고 나서 '물 좀 먹였어'라고 자랑한다.
물이 무슨 죄일까···
막상 물 얘기가 나오니 몇 년 전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섬찟하다.
예전에 스터디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임 특성상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이 말을 도통 안 하는 것이다. 첫인사에 본인이 말주변이 없어서 이렇게 공부하러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서로 익숙해지자 사람들은 그를 '물'로 보기 시작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평소에 그분은 자신의 의견도 없고, 매사 모두 좋다고만 하니 모두들 그를 대할 때는 목에 힘을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을 물어봐도 자기는 아는 게 없다며 무조건 분부대로 따르겠다는 말을 레퍼토리 삼아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어느 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한동안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었다. 이런 망할 일이 있다니. 쥐구멍은 어디 있나. 아무튼 제대로 '물' 폭격을 당한 셈이다. 그분은 그 뒤로도 저자세였지만 분위기는 한동안 조심스러웠다. 불보다 특히 '물'조심에 신경 쓰자는 그날의 에피소드는 아직까지 생생하며 유효하다.
물은 강하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그릇에담기든 그 형태를 존중한다. 무조건 수용한다.
물을 비하하지 마라.
듣는 물 서러워서 폭격할지 모른다.
단 한 장의 페르소나도 걸치지 않은 물을 부정해선 안된다.
그날 스타벅스에서 생긴 일은 과거 에피소드가 소환된걸까.
내 태도는 스타벅스 직원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내가물을 무시했던 꼴이 되었다.
주거니 받거니 따지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이게 물처럼 보이시겠지만, 이까짓 게 뭐라고 물이겠어요. 사실은 물이 아니고 페퍼민트이니,
테이크 아웃 좀 해주실래요?"
이렇게 말했더라면 그 시간 그곳의 공기가 좀 시원하지 않았을까.
누구든 "이거 물이니?"라고 물을 자유가 있다 누구든 "이거 물 아니다" 대답할 자유가 있다 다만 두 개의 자유는 '물'을 존중해야 한다. 대뜸 물이라 화내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