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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Oct 29. 2022

자취를 단념하기 위해 필요한 것

지금을 충분히 즐기는 방법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지 어느새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재직기간이 짧아 대출 자격 미달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은행을 나선 지도 그만큼이 흘렀다. 이제는 급여명세서를 가지고 은행을 찾아가 당당하게 대출 심사를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부모님 댁에 살면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취를 하고 싶은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부모님 댁이 회사와 멀어서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나만의 공간을 얻고 싶어서 자취를 하고 싶은 내게는 누구든 설득할 수 있는 핑계가 필요했다. 주변 사람들이 '집이 멀어서 어떡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의 핑계는 견고해졌다.




하지만 자취를 하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겨보려는 순간 깨달았다. 자취의 기반은 자취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라 자취를 감행할 수 있는 돈과 용기라는 것을. 부족한 통장 잔고를 대출로 메워보려 했지만 그것마저 자격 미달이었다. 지금까지 금전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돈은 늘 아쉬웠고 더 있었으면 좋겠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돈 때문에 무언가를 시작조차 못한 적은 없었다. 당장 수중의 돈이 없더라도 언제나 다른 방법이 있었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든가 장학금을 받는 것이 깜짝 선물처럼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대출 안내문만 손에 쥔 채 은행을 나올 때는 내게 대안이 전혀 없었다. 노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단념해야 했다.


만약 돈이 많았다면 과감하게 자취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해도 고민했을 것이다. 혼자서 살림을 꾸려나갈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테다. 무엇보다 어두운 밤 홀로 집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자기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공포물은 절대 보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은 내가, 잠들기 전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면 아빠의 코골이 소리와 엄마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위안을 삼는 내가 혼자서 긴 암흑의 밤을 넘길 수 있을까? 자취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적인 자유를 누리는 낭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야 와닿았다.




자취를 단념한 내게는 다른 종류의 돈과 용기가 생겼다. 비록 나만의 시공간은 사라지고 장거리의 출퇴근길을 견뎌야 하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뒤따른다. 수중의 돈에 맞춰 월세를 얻었든 대출을 받아 전세를 얻었든 상당한 금액의 월세나 이자가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 댁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통장의 잔고가 매달 만족스러운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매달 가계부를 정리할 때마다 '만약 자취를 했더라면'을 떠올리며 나의 결정을 칭찬한다. 출퇴근의 질이 떨어지면 전반적인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처음에는 끝도 없이 느껴지는 출퇴근길이 막막했으나 이제는 생체 리듬이 장거리 출퇴근길에 적응해서 예전처럼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덕분에 기분 전환 삼아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고 고가의 태블릿 PC를 구경하며 구매를 고민하는 적당한 사치를 누릴 수도 있다.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힘들지만 내게는 4시간의 왕복 출퇴근길을 기꺼이 매일 견뎌내는 용기가 있다. 운이 좋아 자리에 앉아 갈 때면 기분이 좋고 퇴근이 늦어져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출퇴근길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지만 그런 마음도 마스크 속의 작은 웃음과 옅은 한숨으로 풀어버린다. 비좁은 열차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느끼는 답답함을 다스리는 능력도 생겨서 공간에 상관없이 나만의 고요를 발견하는 방법도 찾았다. 내 손이 들고 있는 것이나 내 귀에 꽂은 것에 최대한 집중하며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기르고 있다.




직장을 옮기거나 집을 옮기지 않는 한 출퇴근길이 바뀌지 않을 거라면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한들 언젠가는 지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출퇴근길을 줄여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지하철역에서 뜻 없이 지하철 노선도를 보던 중 연두색의 선 하나가 점점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년에 개통을 앞두고 있는 서해선이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노선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최대 30분은 단축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년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출퇴근길이 줄어드는 것이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막막함을 이길 줄이야.


지하철 노선 개통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기나긴 출퇴근 시간에만 책을 읽었을 뿐인데 한 달에 6권이라는 마음의 양식을 기록했다. 삭막한 퇴근길, 고속터미널역 한쪽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잠깐 동안 마음을 말랑하게 해준다. 야식이라도 먹고 싶은 날이면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는 백화점 식품관으로 들어가면 된다. 파격적인 마감 세일 덕분에 원플원은 기본이요, 3분의 1 가격으로도 살 수 있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편한 출퇴근길과 자유로운 나만의 공간이 생길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을 최대한 즐기고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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