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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ma Ward Feb 05. 2017

퇴사하고 나는 상해로 간다.

한 번만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2015년 10월 상해를 처음으로 방문하기 전까지,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관심도 없었다.


나는 대기업에서 3년 차를 달리고 있는, 아직 까마득한 막내였다. 맡고 있던 직무는 내가 하고 싶던 직무와 한참 멀었었고, 그저, 매달 주어지는 월급, 가끔 들리는 부모님의 자랑, 겉보기에 나쁘지 않은 타이틀. 그런 외부 조건들에 나는 그저 '묵묵히' 다녔다. 

회사에서 채워질 수 없는 나의 욕구들, 쌓여만 가는 불만, 스트레스, 그런 것들을 나는 관계에서 찾으려 했다. 다들 그렇듯이 좋은 남자만 만나면, 나보다 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만 만나면, 그래서 자리를 잡으면. 내 삶도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그렇게 영혼 없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나는 수동적이었다.


10월 내 생일에, 친구가 제안한다. '너 생일에 상해 다녀오자.' 상해에 대한 이미지는 고작, 루프탑 바, 동방명주 그 정도가 전부였다. 사실, 중국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10월 상해로 여행 일정을 정하자, 인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단, 대학 시절 갔던 스웨덴 교환학생 때 룸메이트였던, 현재 베이징에서 일하고 있는 중국 친구가 서울을 방문했다. (사실 중국인과는 벌써 인연이 이렇게 닿았었다. 그때는 기회가 기회인 줄 모르고 그저 스쳐 지나갔다.) '너 상해 간다고? 그러면 Y양에게 연락해봐! 지금 상해에서 박사하고 있잖아.' Y양은 우리의 또 다른 중국인 룸메이트였다. 그리고는 위챗으로 연락처를 알려줬다. Y양에게 연락이 닿았고, 그녀는 흔쾌히 말한다. 


'상해에 친구랑 같이 온다고? 그러면 내 기숙사 방에서 자! 내가 방 비워줄게!


그렇게, 심지어 휴가도 안 내고, 금요일 밤~ 일요일 밤의 2박 3일 일정으로 상해 여행이 시작되었다. 스웨덴에서 본 지 3년 만에 나는 이 중국 친구를 상해의 대학교 교정에서 다시 만났다. 친구는 나에게 '중국식 대접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듯, 성대한 저녁을 베풀었고, 자신은 다른 곳에서 자도 된다며, 나와 내 한국 친구에게 흔쾌히 방을 내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시작된 짧은 상해 거닐기. 상해의 잠들지 않는 밤부터, 학교, 와이탄까지-

내가 밤낮으로 본 상해의 여러 면모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혼재되어있는 듯한, 생각보다 훨씬 글로벌한 상해의 모습에 나는 빠져들었다.

친구의 학교 교정을 거닐면서, 그리고 프랑스 조계지의 영어 서점에서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한 번만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나는 퇴근 후 각종 해외 대학 MBA/석사 인포세션들을 찾아다니고, 해외의 대학들을 서치 하기 시작하고, 석사 필수 요건을 준비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번 돈으로 갈 수 있는 대학들은 한정적이었다. 학비와 생활비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대학을 찾다 보니 아시아권에서는 역시, 물가와 학비가 비싼 싱가포르/홍콩보다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가장 명문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학교들에 직접 가보기 위해 2개월 뒤, 북경으로 향했다. 나는 북경의 칭화대학교를 방문했고, 이 곳에서 석사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한국 사람들이 (특히 학부로) 중국에 유학을 와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겨울 스모그에 패배했다. 3일간의 북경 여행 동안 앓기 시작하고 다녀온 이후에도 몸이 안 좋아져서 일주일 후에야 겨우 회복을 했다. 이때, 북경이 아닌 상해로 석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래저래 따져보니, 나에게 적합한 프로그램은 바로 나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중국 친구 Y양의 학교에 있었다. 미리 봐 두었던 영어 성적과 각종 서류들을 구비하고, 스카이프 면접을 거쳐, 학교 어드미션을 따냈다. 퇴사를 결정했고, 부모님을 모시고 상해로 가서 학교도 구경시켜 드리고 상해를 보여드렸다. 이때 Y양이 가이드 역할을 너무나 잘해주면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부모님의 인상은 확 좋아졌다. 부모님은 나의 유학에 대해 '반대'에서 '지지'로 상해 여행 이후 완전히 바뀌셨다.


퇴사 후 퇴직금으로 언제나 꿈꿔오기만 했던,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했던 '남미'를 가기로 결정했고 남미를 가니 가까운 북미도 가보고 싶어 져서 미국과 캐나다도 일정에 넣었다. 그리고 작년 9월 입학하기 전, 나는 남미와 북미를 돌며 또 다른 자극을 받았다. 


퇴사를 결정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우려 섞인 말들도 많았다. 

'더 준비해서, 중국어도 더 공부해서, 아예 장학금 받고 몇 년 뒤에 가. 경력도 더 쌓고'

'지금 유학 가면 시집은 어떡할래'


뭐 그런 것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가고 싶은 지금, 올해 당장 떠나는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하루라도 젊을 때,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퇴사 후의 struggling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하루하루 아무 보호막도 없이 전쟁처럼 살아가지만, 하루하루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끔은 다른 문화,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접하는 고충들 때문에 짜증 나고 힘들 때도 많지만, 앞으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 고민이 끊이지 않지만, 나의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지금.


아직도 그 오피스에서 그 사람들과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경험,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누굴 훈계하려는 것도 아닌,

그저, 나를 옥죄고 있던, 갑갑했던 틀을 깨고 나와,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내 일상에 대해서 공유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 결정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인생에서 가장 큰 턴(turn)이었다. 내 마음을 따르는, 드디어 내 마음을 따르는 결정.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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