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의 어느 날. 간밤의 기록적인 한파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피해 소식들이 아침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까운 지인도 동파 피해를 입었는데, 작업실의 수도가 터져 넘치는 바람에 마룻바닥이 물로 가득 차 버렸다. 게다가 흘러넘친 물이 옆 집 가게에 까지 넘어가면서 대신 수리를 해줘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황당하기도 하고, 웃프기까지 한 마음 때문에 지인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오늘의 운세를 찾아봤다고 한다. 놀랍게도 운세 서비스는 재산상의 손해를 매우 강력한 어조로 예측하고 있었다고 했다. 상기된 어조로 전해주는 지인의 무용담을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날의 동파사고는 정말 지인의 운세가 사나워서였을까? 옆 집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또한 사건의 발생이라 할 수 있는데, 둘 중 누구의 운이 좋지 않아서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진 것일까?
그해의 겨울에는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가 넘을 정도로 혹독한 한파가 지속적으로 찾아왔다. 그리 춥지 않을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측과는 달리, 필자를 포함한 많은 역술가들은 경자년의 겨울이 유독 추울 것이라 전망했다. 음양오행의 관점에 따르면 경자년은 금생수의 기운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수水의 특성을 대표하는 겨울의 특성들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화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수水는 보통 겨울/북방/한기 등 을 상징한다. 과학자들은 겨울철 북극의 한기를 막아주는 제트기류가 지구온난화로 인해 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분석했다.
어찌 됐든, 무언가에 의해 야기된 자연의 변화와 작용 때문에 지구 곳곳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한파가 찾아왔다. 어쩌면 이러한 자연의 거대한 전환은 사실 개개인의 운의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우주적 차원의 일이리라. 그해 겨울 전국적으로 1만 건이 넘게 발생한 동파사고 역시 단지 우리들의 일진(오늘의 운세)이 사나워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길하든 흉하든) 수많은 사건은 대부분 자신의 운세가 좋거나 나빠서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개인적 차원이 아닌 전지구적 [오늘의 운세]라는 것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동양철학 및 역학에서는 종종 '체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러 현상의 선후 관계를 설명해왔다. 체용體用의 한자는 각각 '본체'와 '작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체용의 관점에서 보면 겨울 한파라는 상위개념인 본체體가 존재했기 때문에 작업실의 동파라는 하위개념의 작용用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는 개개인을 둘러싸고 영향을 주는 거대한 '전제前提'로서의 체體적 조건이 존재한다. 예컨대 다양한 생물들 중 인간 종인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난 것, 개개인의 끊임없는 자본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난 것, (하필?) 대한민국 사회에서 태어난 것, 부유하거나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것, 건강하거나 그렇지 않은 몸으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체體는 일종의 경계 혹은 한계, 명리학에서 말하는 나를 극하는 힘인 관성官星 이기도 하다. 그 경계/울타리/본체 안에서 우리의 삶은 수많은 작용用을 만들고 경험한다.
그러니 오늘의 운세와 같은 작용用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 수많은 '체體'를 우선 마주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현재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다면, 아무리 우호적인 운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건강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긍정적인 작용으로 발생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건강하고자 한다면 오늘의 운세가 아닌, 우선 본체인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번 한파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체體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그것이야 말로 정말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생에서는 바꿀 수 없는 생의 조건이다. 인간의 본체體로 태어났기에 겪어나가야만 하는 삶의 수많은 작용用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이것 또한 전생의 삶(체)에서 현생의 삶(용)으로 이어지고 있는 업보(karma/까르마)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19년 12월에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인간들은 함께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 #언택트라는 새로운 형식처럼 우리 모두는 재난을 통해 삶의 거대한 전환을 함께 요구받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은 이제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 가는 듯' 한 추상이 아닌, 모든 인간의 삶, 그리고 나의 삶에 침투하며 연관되고 있는 실체實體가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재난은 어쩌면 모든 인류의 업(karma)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이웃의 동파 피해 또한 나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달라이 라마와 같은 세계 영성가들의 오랜 지지를 받아온 생태철학자이자 불교적 생태운동 활동가인 조애나 메이시는 말한다.
먼저 내 안에서 평화를 찾은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는 말은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관념입니다. 대신 개인만의 구원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이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대부분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경제적 풍요와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좋든 싫든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어 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라 할 수 있다. 항성 역할을 하는 태양과 주변의 수성, 금성, 지구, 화성, 토성, 목성 등 많은 행성들이 태양계로서 연결되어 있고, 태양계 또한 그 너머의 거대한 우리은하와 공동체로서 연결되어 있다. 지구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의 몸조차 대략 60조 개의 세포들과 300조 개의 미생물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어 일종의 공동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세계에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도 이러한 이치를 연기법으로 이야기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요컨대 연기법은 “모든 괴로움은 절대적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연기되어 있으므로, 그 조건과 원인을 파악하여 괴로움을 극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으며, 그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인간 스스로의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이며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貪愛]’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박경준 교수 / 동국대 불교학과>
사람들은 종종 개운법을 물어본다. 앞으로의 삶에 흉보다는 길한 것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밤에서 낮으로 또 낮에서 밤으로 이어지듯, 음양陰陽의 끊임없는 순환이 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개개인의 길도 흉도 그저 오고 가고 이어지며 순환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우리들의 운세를 조금 더 길한 방향으로 개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우리가 함께 몸 담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그 본체本體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 안의 수많은 삶의 작용作用 또한 흉보다는 길하다 경험되는 날들이 더욱 많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당장 눈앞의 이익을 손에 잡으려 쫓아가기 전에, 이 개인적 행위가 결국 어떻게 모든 인류의 업에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가까운 이웃들의 삶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공동체적 관점으로 함께 심사숙고해봤으면 좋겠다. (너무 도덕 선생님 같은 말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