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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Feb 02. 2024

행복보다 편안함이 어려운 날, 밥솥 팬케이크

추천곡: 선우정아 <구애>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비록 멀리 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아껴 주는 가족도 있고, 책을 통해 자아실현도 하고 있는데, 사는 게 이유 없이 고단하고 버거워서 서글픈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 할일을 전부 미뤄둔 채, 눈물을 흘리다 다시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들었어요. 생리전증후군이겠거니, 이 기분 또한 지나가겠거니, 가볍게 넘기려 애썼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더라고요. 콜센터에 다닐 때처럼 특정 가능한 이유가 있다면 이해가 될 텐데, 삶에 불만을 느껴야 할 요소가 하나도 없을 때 존재하지 않는 신체 부위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모든 화를 챙겨 보지 않았지만, 마지막화에서 고 이선균 배우님이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라고 묻는 마지막 장면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행복이 아닌 편안함을 묻는 게 좋았어요. 행복보다 편안함이 더 어려우니까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떠들 때,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 일본어로 ‘코모레비(木漏れ日)’라고 부르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형체 없는 장면을 볼 때, 길을 걷다 소담하게 핀 꽃이나 귀여운 길고양이를 만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밥을 먹일 때, 누군가의 다정한 마음을 받을 때, 원하던 물건을 가졌을 때, 여행길에서 마음에 드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저는 행복합니다. 우울한 상태에서도 잠깐은 행복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모든 행복을 다 모아도, 편안해질 수는 없나 봐요.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면 편안해질까요? 집을 사고, 노후 준비가 끝나면 편안해질까요? 아이를 낳거나, 고양이를 기르게 된다면요?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져도 영원히 편안함에 이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깊은 밤처럼 나를 삼킵니다. 부모님께 말한다면, 신앙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겠지요. 정말 신을 사랑하지 않는 벌을 받는 것이라면 납득이 쉽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행복에 대한 환상만큼 편안함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지에 이른 성인이 아니고서야 평생 편안함을 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심보이지요. 혹시 어디선가 <나의 아저씨>의 최종화 이후를 살아갈지도 모를 박동훈 사장과 이지안 씨도, 삶의 또 다른 고비를 맞아 편안함이 흐트러지지는 않을까요.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못된 마음이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나의 ‘편안하지 않음’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안함은, 한번 이르렀다고 그 상태에 계속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바다 한가운데에 띄운 에어 매트 보트를 편안함이라고 불러 보기로 합니다. 물이 잔잔할 때는 안온한 햇살과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누워 있다, 파도가 치면 허무하게 물속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기어올라요. 풍랑을 만나 매트가 너덜너덜해지기도 하지만, 다시 수리해서 쓰는 거죠. 그러다 언젠가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어지는 날이 오겠지요. 혹은, 푹신한 에어 매트 위보다 차가운 바닷속이 편안하게 느껴질지도요.


바다 이야기를 하니 최근에 들은 말이 떠오르네요.


너는 바다 같아. 잔잔할 때는 한없이 잔잔하다가도, 요동칠 때는 누구보다 거세게 요동쳐.


지금은 요동치는 때인가 봅니다.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주는, 지속적인 우울이 아니라면, 도쿄의 포근한 겨울 햇살을 쫴고, 이번 달에 등록한 운동을 하고, 밥을 잘 챙겨 먹고, 술은 줄이고, 제 때 누워 잠을 잘 자다 보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잔잔한 상태가 되겠지요. 다행히 벌써 며칠이 지난 지금은 평상심을 거의 회복했답니다(…그런데 아직 기침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데, 도대체 전 무엇에 걸린 걸까요?)


그나저나 오늘, 금요일이 되어 혼밥 일기를 쓰려 냉장고를 여니, 양념만 가득하고 식재료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동안의 제 상태를 증명하듯이요. 쓸만한 건 라면 한 봉지와 남은 팬케이크 믹스, 그리고 며칠 전에 사 온 달걀. 라면은 질리니까 팬케이를 만들어 먹기로 했습니다. 꾸덕한 느낌을 좋아해 일부러 정량보다 우유를 많이 넣었어요. 별생각 없이 크림치즈를 넣은 것도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토마토나 베이컨, 루콜라 같은 야채를 곁들였다면 더 그럴싸했을 텐데, 현재 제 냉장고에서는 이게 최선이네요. 그래도 크로플을 자주 구운 덕에 잼이랑 메이플 시럽이라도 있는 게 어디예요.



팬케이크: 팬케이크 믹스 100g, 크림치즈 1T, 우유 100g, 달걀 1, 버터 2T
토핑: 블루베리잼, 메이플 시럽, 달걀

1. 팬케이크 재료를 한꺼번에 볼에 담아 잘 섞는다.
2. 반죽이 달라붙지 않도록 밥솥에 버터를 바른 뒤, 1을 붓는다.
3. 속이 다 익을 때까지 찐다.
4. 완성된 팬케이크 위에 블루베리잼과 메이플 시럽, 달걀 프라이 등을 올린다.


오늘 추천곡은 제가 최근에 깊은 여운을 남긴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잠깐 등장했던 곡입니다. 선우정아의 <구애>. <동거>라는 곡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구애를 해야 동거를 하겠죠.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당최 모르겠어서
이렇게 저렇게 꾸며보느라 우스운 꼴이지만
사랑받고 싶어요 더 많이 많이


사랑을 많이 받으면 편안해질까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주인공도 사랑을 찾았고,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 <닥터슬럼프>도 로맨스의 비중이 적지 않던데 말이에요. 아무튼 저를 포함해 다들,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편안함이 너무 어렵다면, 어딘가 분명히 있을 행복이라도 꼭, 찾으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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