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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Feb 23. 2024

목포 혼밥 일기, 홍어라면

추천곡: 루시드폴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목포의 풍경을 창틀에 담아 둔, 아늑한 카페에 앉아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니까 이번 주는 <도쿄 혼밥 일기>가 아니라 <목포 혼밥 일기> 혹은 <목포 혼술 일기>가 되겠어요.


일본에 사는 제게 국내여행은 웬만한 해외여행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일 년에 두어 번 한국을 찾지만, 그때마다 지방에 사는 가족과 친척도 만나야 하고, 서울과 경기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과도 놀아야 하고, 주로 강남에 결집한 병원도 순회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2월에 스스로에게 주기로 한 일주일의 휴가에는 꼭 국내 어딘가를 혼자 여행하기로요. 늘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요.


지역은 음식이 맛있는 전라도로 결정. 전라도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 중 대중교통으로 다닐 만하고 바다가 있는 목포가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1박 2일 동안은 일정을 비워 두고, 호텔과 기차표를 예약했어요. 전날 밤에는 성남에서 두 아이를 기르는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고 수서역에서 출발했고요. 그러고 보니 SRT도 첫 승차였네요. 오후 3시 34분. 태어나 처음으로 목포에 내린 시간입니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을 잡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서 뒹글기만 해도 좋았을 거예요. 날씨가 좋았다면요. 아쉽게도 목포에서는 이틀 내내 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했는데, 호텔까지 걸어가는 길이 유독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워 솔직히 아주 잠깐은, 괜히 왔나 싶기도 했답니다.



우려는 저녁 6시까지 이어졌어요. 목포에서 꼭 가고 싶었던 술집이 오픈하는 시간이요. 지인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누가 소개해 주었는지는 비밀로 해야 했습니다. 일본에서 왔다고도 하지 말라는 지령을 받았기에, 서울에서 여행 와서 혼자 술 마시는 청승맞은 여행객 행세를 해야 했지요.


그런데 시나리오 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원래 소개받은 술집에서는 간단히 1차만 하고 2차는 칵테일 바에서, 3차는 호텔에서 야경을 보며 즐길 생각이었는데, 가수 분께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노래를 불러주시고, 일을 도와주는 분께서 함께 술을 마시다, 아예 그분의 일행과 합석까지 하게 된 거죠. 서울에서 왔다는 설정을 유지하기 위해 죄송하지만 도쿄에 오기 전 아이덴티티를 소환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밤, 그 술집에서의 저는 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과거의 저와 미래와 저가 교차한 제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낯선 공간과 스치는 인연 틈 속 가장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꺼냈으니, 어쩌면 그쪽이 더 진짜에 가까웠을까요? 술과 음악은 어떤 밤을 꿈으로 바꾸나 봅니다.


호텔에 들어온 시간은 새벽 2시 10분경. 다행히 분실한 건 제 기억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누가 왜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에쎄 담배와 치실이 소지품에 추가되어 있었네요. 아, 생각해 보니 분실물이 하나 더 있었네요. 사진이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그날 목포에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다 지웠는데, 도통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휴대폰으로 전송하려다 실수로 삭제 버튼을 누른 걸까요. 아니면, 그날의 이야기는 여행지에서 만난 신기루와 같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걸까요.


‘철 좀 들자, 이예은’을 구령처럼 외치고 해장하러 간 곳은 목포라면 홍어라면. 홍어애국과 홍어라면 중 고민하다 얼큰한 국물이 나을 것 같아 라면을 선택했습니다. 콩나물은 아삭하고, 매콤한 국물에 홍어의 시원함이 배어 있어 속이 풀렸어요. 함께 나온 푹 익은 김치도 잘 어울렸고요. 숙취가 있을 때는 액체만 넘어가는 편이라 건더기는 홍어만 겨우 건져 먹고 면과 야채를 많이 남겼습니다. 처음으로 혼자인 게 죄스러웠어요.



목포라면 홍어라면
주소: 전남 목포시 영산로 40번 길 16
영업시간: 매일 10:30~21:30
전화번호: 0507-1330-4564


그래서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루시드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바람은 또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내 마음에 덧댄 바람의 창 닫아보아도
흐려진 두 눈이 모질게 시리도록
떠나가지 않는 그대.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혼란 속, 진실 속, 음악과 술이 끊이지 않았던 거짓말 같은 밤. 단 몇 시간짜리 인연이었다 해도, 혼자였던 제 곁을 지켜주신 마음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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