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곡: 임영웅 <모래알갱이>
이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잘한 일은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것, 그리고 심리 상담을 시작한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쉽게 엄두가 나지 않지만,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비대면으로 진행할 수 있는 곳도 많더라고요. 그래도 처음에는 상담사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서울에 있는 동안 예약을 잡았답니다.
그동안의 제 이력을 살펴보면 상담받을 이유는 진작부터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기분 부전이 심했고, 아버지와 싸운 날이면 가벼운 자해를 했고, 해외 기숙사 학교로 보내진 고등학교 때는, 어느 날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아예 음식을 먹지 않았더니, 몸무게가 10kg 넘게 빠져 거식증 환자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또다시 낯선 나라에서 홀로 부유한 이십 대 초반에 우울감과 자살 사고가 가장 강력했는데, 성인답게 약 대신 술과 줄담배, 연애에 의지했고, 교회도 간간히 다녔네요.
우울감이 일정 수준을 상회한다 싶으면, 그 원인을 제거하기 바빴던 20대였습니다. 반복된 퇴사와 이별, 그리고 도망치듯 떠난 유학이 그 증거겠지요. 어쩌면 비교적 이른 나이에 한 결혼이 마지막 도피였을까요. 그 조차 완전하고 견고한 성이 아님을 이제는 알지만요.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나오는 이 구절을 필사까지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왜 저는 자신의 행복을 누군가에게 의탁하려고만 했을까요.
상담사 선생님 앞에서는 지금까지의 일들과 가족 관계, 현재 처한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MMPI와 TCI라는 검사도 진행했어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문항이 많아 지치더군요.
TCI 결과는 아직 설명 듣지 못했지만, MMPI에서는 예상대로 기분 부전, 자살 사고, 내향성, 예민성, 권태, 무기력 등이 높게 나왔습니다.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척하지만, 사실 의존적인 성향도 발각되고 말았고요.
‘궁금한 점 없으세요?’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어요. ‘네, 뭐 이 상태로 살아왔군요’라는 감상뿐이었으니까요.
높은 자살 사고 지수를 염려하시길래, 내일이 오지 않아도 괜찮겠다 막연히 생각할 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다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적어도 올해 상반기까지는 살아야 할 이유도 많고요.
상담의 목적을 물으셨을 때는, 잠시 고민하다 나와 좀 더 잘 지내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나를 더 잘 이해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그 첫걸음을, 잘 뗀 것이겠지요?
오늘의 요리는 한국에서 먹은 마지막 식사, 내장국이었어요. 내 거추장스러운 마음, 아픈 장기도 이렇게 꺼내서 씻고, 자르고, 삶아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특별히 맛집이 아니기도 하고, 제가 신세 진 언니 집과 지나치게 가까워 가게 정보는 생략할게요.
노래는 조금 의외일지도 모르겠어요. 파주 어느 아웃렛에서 언니의 옷 고르는 모습을 구경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노랫말과 목소리를 찾아보니, 임영웅의 <모래알갱이>였답니다.
그대 바람이 불거든
그 바람에 실려 홀연히 따라 걸어가요
그대 파도가 치거든
저 파도에 홀연히 흘러가리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일 거예요.
아마도요.
설령 제가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기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