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에서
처음 사랑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색이 내 몸을 온통 물들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연인임을 선언한 뒤 처음 오랫동안 떨어지게 되었을 땐, 팔다리가 잘려나간 듯 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20대 초반의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와 그로 인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게 먹고, 적게 자고, 매일 울었다. 첫사랑은 처음이니 당연히 서툰 법이지만, 내 서툶은 그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점이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기운 연애의 끝이 결코 좋을 수가 없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처음 바닥까지 내보인 관계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나면, 지독한 허무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뒤에도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을 겪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를 꽁꽁 싸맨 채 외로움만 달래려 했다. 상대방을 온전히 믿지도, 마음을 완전히 주지도 않았다. 언제든지 헤어져도 괜찮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름의 방어태세에도 불구하고,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연애는 내게 환희와 절망, 아름다움과 추잡스러움을 절절히 경험시켜주었다.
회의에 빠진 어느 날, '도대체 나는 남자를 왜 만날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공식적인 애인이 없더라도, 연락을 주고받거나 종종 식사나 영화를 함께 즐기는 '썸'은 늘 존재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외모나 직업, 성격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데 연애 경험이 전무한 또래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들은 농담 삼아 '모쏠(모태 솔로)'라고 자조하곤 했지만, 나는 그녀들에게서 부러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외로움의 밀도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10대에 가족과 떨어져 살기 시작하고, 잦은 전학 탓에 '오랜 친구' 하나 없는 나와 달리, 그녀들 주위에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 있는 부모님과 심심하면 언제든지 불러도 되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부족함이 없으니 절박하지 않고, 절박함이 없으니 모든 관계에 신중히 임했다. 가벼운 마음에 혹해 쉽게 상처 받고 상처 줄 일 따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비극은 혼자가 싫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만난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 나는 연애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 시간과 체력을 쏟기로 했다. 심리학 서적은 한 결같이 외로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없애려 하지 말고 공존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외감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인 '론리니스(loneliness)'와 본연의 나로 있기 위한 자발적 격리인 '솔리튜드(solitude)'가 다르다는 사실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다면 ‘론리니스’를 어떻게 ‘솔리튜드’로 승화시켜야 할까. 나는 외로움이 밀려오면 메시지가 쌓인 휴대폰 대신 펜을 집어 들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새에 조금은 진정이 됐다. 눈물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자기 비하는 멈추었다. 억지로 약속을 잡는 대신 카메라를 들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음악의 위로도 컸다. 외로움을 타인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면, 그 실망감에 상황은 악화되고 만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누군가 함께 있을 때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른의 사랑, 혹은 성숙한 연애라고 해서 크게 다를 필요는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인격이 완성돼도, 사고처럼 들이닥치는 사랑 앞에선 속수무책일 테니까. 게다가 만남을 통해 얻는 교훈이나 경험도 무시하지 못한다. '악(悪) 경험도 경험'이라는 말처럼, 나 역시 구질구질한 연애 혹은 '흑역사'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으니.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혼자됨을 견디지 못해 사랑과 친밀감을 착각하는 연애는 어느 순간 졸업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후로 내 연애사가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단 한 번의 연애와 함께 종말을 맞았다.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정적이어도 너무 안정적이어서, 고독이 몰고 오는 감성과 예민함이 그리울 지경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