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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주고 약 주고

필요 없어! & 사랑해~

by 혜솔

자다가 깬 로리가 갑자기 짜증을 낸다.
"할머니 필요 없어! 저리 가~" 뭐가 불만인지 계속 징징대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쳐다본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내 표정이 좋지 않자 바로 사과를 하는 로리.

'필요 없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건 몇 개월 전부터였다. 이야기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로리가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말을 배울 때처럼 아무 데나 써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에게 '필요 없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예쁘지 않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필요 없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기분이 안 좋거나, 제 맘대로 되지 않거나, 누군가에게 떼를 쓰고 싶을 때마다 로리는 가족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아빠 필요 없어~ 아앙! 양치 안 할 거야!"
"아니야, 정리 안 해~ 엄마 필요 없어!"
"더 잘래! 할머니 필요 없어 들어가!"

그 말을 들으면 참 기분이 언짢고 괘씸하다. 제 일거수일투족을 받들며 키우고 있는데, 아무리 아기라 해도 말을 할 줄 아는 녀석이... 하는 생각에 표정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엄마는 삐지기도 하고, 아빠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 로리는 곧장 사과한다.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로리는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을 때, 참견당하기 싫을 때, 누군가를 선택할 때
'필요 없다'라는 말을 쓴다. 즉, 로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 말을 필요에 맞게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가르쳐보려고 한다.
"로리야, 사람한테 '필요 없어'라는 말은 안 좋아, 그러면 사람들이 속상해."
토닥이며 이야기하자, 로리가 반짝이는 눈으로 외친다.
"그럼 할머니 필요 있어! 할머니 좋아, 사랑해~" 순간 마음이 녹아내린다.

"요 녀석이 병 주고 약 주네?" 내 말을 들은 로리가 곧바로 묻는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뭐야, 할머니?"

"로리가 할머니 마음 아프게 하고는 사랑해~하며 약을 줬잖아. 그게 병 주고 약 준 거야."
대충 설명했는데, 로리는 이미 흥미를 느낀 듯 내 팔을 찰싹 때리고는 입을 갖다 대고 호호~ 불어준다.

"할머니 맴매 하고 로리가 호~ 했으니까 병 주고 약 주고!" 하며 깔깔깔 웃어댄다.

로리는 새로 배운 말을 이렇게 쓰고 있다. 조금 어설프지만, 사랑을 전하는 법도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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