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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

by lala

그 기간 동안 나는 투명 인간 혹은 그림자 사이를 오가는 존재로 집 안을 돌아다녔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편할 수가 없었다. 서연과 아내 사이에 껴서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통에 눈알이 다 돌아갈 지경이었으니까. 심지어 이 기간이 최대한 오래 계속 지속되기를 기도했던 것 같다. 불 같이 뜨거운 아내의 말에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차갑지만 차분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더 숨구멍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평화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한 달 동안 평안했던 아침 식사 시간은 또다시 전쟁터가 됐다. 문제는 아이의 학력 평가 때문이었다.

“서연이 3월 학평이 엉망이야.”

“학평?”

나는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목과 코 어딘가에 걸린 시리얼을 삼켜내며 되물었다. 앙칼진 아내 목소리에 식탁은 금세 찬 기운이 일었다.

“전국연합학력평가 말이야. 처음으로 치르는 시험인데, 내가 진짜 선생님하고 상담하면서 얼마나 창피하던지. 수석 입학을 하질 말던가.”

윤희는 마주 앉은 서연이를 째려보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나는 눈치껏 출근 시간과 아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체크한 뒤 조심스럽게 시리얼을 입으로 가져갔다.


“당신은 궁금하지도 않아? 애가 몇 등급을 받았는지? 나만 열불 나?”

또다시 손 부채질하던 윤희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최대한 걱정스러운 얼굴을 띄고 서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험이란 게 잘 볼 때도 있고 못 볼 때도 있는 거지. 이참에 현재 위치를 객관적으로 잘 파악해서...”

“말 잘했어. 당신이 객관적인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말해두는 건데, 서연이가 남친이 생겼더라고.”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을 바득바득 씹으며 아내가 말했다.

“남친? 남자 친구?”

나는 홱 얼굴을 돌려 서연이를 쳐다보았다.

“최근에 생겼어요.”

서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시리얼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넘기지 못한 시리얼은 우유에 퍼져서 눅눅해져 있었다.

“정신이 나간 거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당신, 서연이 통화 내역 좀 뒤져봐 봐. 뭐하고 돌아다니는지 부모가 알아야지.”

순간 멍해진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윤희는 식탁 위에 놓인 서연이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연신 턱짓했다. 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순간 지난번 아내가 빨래 더미를 집어 던져 서연이의 얼굴에 맞혔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어.”

나는 쯧, 소리를 내며 말한다.

“내가 너무 한 거 같다는 얼굴이네. 아주 나만 못됐고 나쁜 부모야. 그것만 알아둬. 당신이 계속 서연이 감싸고돌면 나만 더 나빠질 수밖에 없어. 하하, 허허거리고 만사가 잘될 것처럼 태평해서 도대체 애가 뭐가 되겠어?”

“당신도 아침부터 참, 그만 좀 해.”

“휴대폰 안 볼 거야?”

아내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서연은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렇게 보고 싶으면 당신이나 보던가!”

짜증 섞인 말로 내가 응수하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나는 진즉 봤어.”

“엄마가 그걸 왜 봐요?”

순간 서연이가 몸을 홱 돌려 거실에 있는 윤희에게 소리쳤다.

“내가 안 보면 누가 보니?”

“언제 봤어요? 왜 남의 물건을 막 뒤지고 그래요!”

“야, 임서연. 고1이 고3보다 중요한 시기야. 까딱 잘못 했다가는 고4 치르는 거야. 알아?”

윤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더니 또 열이 올라오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엄마가 뭔데, 내 일에 이래라저래라 해요!”

서연이가 악에 받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신! 지금 애가 내 앞에서 소리 지르는데 뭐 하고 있어? 하! 이러니 애가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알고 엇나가지. 내가 죽어야지.”

윤희는 쥐고 있던 물 컵을 개수대에 집어 던지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차라리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서연이가 손에 쥔 숟가락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임서연!”

나는 씁,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만하라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아빠는 엄마가 내 휴대폰 뒤져본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서연이가 내리깔았던 눈을 치켜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이다.

“좋겠다, 엄마가 비정상이라서!”

개수대에 앞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서있던 윤희가 버럭 소리쳤다.

“아빠...”


서연은 그런 윤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목을 빼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윤희와 서연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나도 알고 있다. 윤희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서연의 편을 들었다가는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갱년기의 윤희는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시퍼렇게 눈을 흘기며 노려보는 윤희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딸아이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엄마가 잘못한 거잖아요.”

서연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으휴, 내가 죽어야지!”

윤희의 목소리가 추임새처럼 거들었다.

“...서연아, 엄마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의 큰 눈에서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순간 서연의 얼굴에 차양이 쳐진 듯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서연은 두어 번 고개를 내젓더니 이내 일어서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연이 남자 친구한테는 내가 알아듣게 잘 얘기했어. 헤어지라고. 별 급도 안 맞는 게 붙어먹어가지고.”

서연이가 나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윤희는 식탁으로 건너오며 말했다.

“뭐?”

“당신 그거 알아? 일반고에서 정시로 명문대 들어갈 확률이 한자리 수래. 어차피 정시는 재수생, 특목고, 자사고에서 채워지게 되어 있고. 그럼 우리가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는 분명한 거지. 학생부 종합 전형이나 교과 전형밖에 더 있겠어? 게다가 이번에 학평 꼬락서니 보니까 얜 가망이 없어. 무조건 수시를 노려야 해.”

“그래, 점수는 그렇다 쳐도...”

나는 지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당신도 행동 똑바로 해. 다음번에 서연이 보면 따끔하게 혼내. 고등학생한테 이성 친구는 사치품이라고.”

윤희는 어금니를 꾹 깨문 채 또박또박 씹어 먹듯 말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식사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밖을 나올 때까지 개운치가 않았다. 상처받았을 서연과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을 남자 친구라는 존재가 오랫동안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드르륵.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간호사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혈압 체크 하실 게요.”

회상에 젖어 있던 나는 그제야 벌떡 몸을 일으키고 허리 위에 손을 얹었다. 지금 와서 이런 일을 생각해봤자 달라질 일은 없었다. 중요한 건 서연이가 무사하게 깨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간호사는 서연의 팔에 혈압계 커프를 감고 버튼을 눌렀다. 지잉 하고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간호사실로 환자분 친구한테서 계속 연락이 왔었는데...”

“서연이 친구요?”

“네, 남자친구인 것 같은데 몇 시간 간격으로 환자분 상태를 물어보더라고요. 많이 불안 하신 거 저희도 이해는 하는데... 하, 근데 아시다시피 스테이션에 문의 전화가 많이 오는데 계속해서 확인 전화를 거시니까 저희도 좀 난처해서요. 괜찮으시면 아버님께서 직접 좀 연락을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서연의 팔에 감긴 커프를 떼어 내며 간호사가 코를 찡긋했다.


“남자 친구라면...”

“최도윤이라고 하던데요, 이름이.”

서둘러 말을 마친 간호사가 혈압계를 정리하고는 병실 문을 나갔다. 순간 수술실 앞에서 고함쳤던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하게 들리는 듯 했다.

‘최도윤이라고, 최도윤! 서연이 피투성이 되게 만들었던 애. 이래도 내가 갱년기라서 예민하게 굴었다고 생각해?’


사용 설명서처럼 한 귀로 듣고 넘기기 바빴던 아내의 잔소리는 늘 그렇듯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얼마나 중요했던 건지 깨닫게 된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나는 주소록을 뒤졌다. 최도윤으로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뱉은 나는 휴대폰을 내던지듯 옆에 던져두고는 서연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최도윤, 그 자식이 이런 거야?”

털썩 주저앉아 묻는 나만큼 볼품없는 질문이 쓸쓸하게 고요한 병실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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