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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Apr 27. 2020

어떤 불안에 관한 기록




완연한 봄이다.


지금이 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 모습이 매년 봐온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오랜만에 들춰본 작년 다이어리 속에선 이맘때쯤 봄을 만끽하던 내 모습이 있었다. 4월 먼슬리 페이지에는 벚꽃 휘날리던 공원을 산책하고 기분 좋아 붙여놨던 벚꽃 스티커들로 가득하다. 한강에서 피크닉도 몇 번이고 즐겼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도 봤고 가족,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의 4월은 조금 다른 기록들로 채워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배워보려 했던 영상 편집 수업과 신인들을 위한 작가 수업이 모두 취소되었고, 가끔 집 근처 카페로 나가는 것 외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최대한 피해 다니느라 애쓴 기록만 남았다. 집에 있는 기간이 자연스레 길어지면서 머릿속엔 쓸데없는 생각들만 가득해졌고, 퇴사 4개월 차 백수는 머릿속에 들어찬 상념들과 싸우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불안을 껴안고 살아왔다. 아주 심하진 않았지만 그 불안의 모습은 참 다양했는데 이를테면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한 불안, 불의의 사고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것에 대한 불안, 미래를 둘러싼 각종 불안... 그런 것들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에, 혹은 겁이 너무 많아 그런 줄 알았는데 일종의 불안 장애로 발전되기 이전의 단계였나 하는 의심을 어느 순간 하기 시작하면서 의식적으로 불안을 외면했고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다. 늘 마음 한 켠의 불안과 살아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항상 여러 선택지 중에 불안을 유발하는 선택지를 택하고 만다.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면서도 끊임없이 불확실 속으로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안정적인 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끝내 잡지 않는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나는 내가 만들어놓은 불확실 속에서 내 안의 불안과 싸우는 시간을 갖는 중이다. 자신 있게 회사를 박차고 나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고 나름대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딱 잘라 설명하면 그저 퇴사 4개월 차 백수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나는 내가 택한 생활을 하는 거지, 남들 눈 의식할 필요 없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위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일단은 새로운 직장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하나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서 스멀스멀 불안과 조급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 퇴사할 때의 계획은 '오펜 공모전에 응모하고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였고 길어야 3개월이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했던 다른 두 개의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그 기간이 조금 더 늘어났고 그 사이 코로나가 유행하는 바람에 소속 없는 생활이 꽤 길어진 탓이다.


그나마 차츰 상황이 마무리되면서 몇 군데 회사에서 면접을 보았지만 여러 생각들이 교차한다. 작가 지망생과 이직을 준비하는 취준생의 나 중에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기도 하고, 어느 방향을 택했을 때 또 그 속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하는 것들. 그간 마음속으로 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생각지 못한 선택지들이 생기다 보면 또 달라진다. 고민을 하다 보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지지만 명확하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는다. 


생각에 잠겨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불안이 또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 같아 얼마 전 산책을 나섰다. 집 근처 공원을 뱅뱅 돌며 산책 나온 많은 사람들을 보는데, 혼자 조깅을 하는 중인 사람들도 있었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었다. 문득 그 모습들을 보며 내가 이렇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천천히 관찰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늘 눈 앞에 놓인 일들을 과제처럼 해치우기 바빴는데 누군가의 모습들을 가만히 보다 보니 어쩐지 잊고 있던 어릴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미래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 날 먹을 저녁을 고민하는 게 삶의 낙이었던 시절. 몰두할 것을 찾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지새우던 시절. 그런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임을 까맣게 잊고 있던 지금. 


매 순간 치열해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잊고 있던 것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눈을 돌려보면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빛이 느껴졌고, 산책 나와 신나게 자연의 냄새를 맡고 있는 강아지들도 있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느릿하게 모든 것을 음미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걷고, 걸었다. 그날 저녁은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노곤해진 마음으로 깊은 잠에 들었다. 


치열하고 열심이지 않아도, 모든 시간은 나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모습을 남길 것이다. 늘 자주 잊는 것이지만 우리는 과거가 아닌,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를 만끽하고 즐겨야 한다. 그게 곧 과거이자 미래가 될 테니. 그 순간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천천히, 조금씩, 길을 더듬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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