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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파바

by 심그미 Jan 30. 2025

영화 <위키드>를 보기로 한 건 정말 우연한 결정이었다. 국장님이 연가를 내신다고 해 나도 하루 일을 쉬었다. 아이들은 평소대로 등원하는 날. 오랜만에 남편과 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 아이들 등원 직후 아침요가 수업을 듣고, 조용한 곳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두고 세 시간 정도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다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반, 이럴 때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부부간의 우호적 이해와 평화가 유지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나머지 반. 데이트 계획은 계속 애매했다. 그래도 얼추 영화를 보고 점심을 사먹는다는 밑그림은 그려졌고, 여차저차 영화도 정했다. 적당히 그 시간에 극장에 걸린 영화를 골랐을 뿐이었다.


이름난 현대 뮤지컬이라는 것 말고는 '위키드'에 관한 어떤 것도 몰랐다. 영화는 뮤지컬 영화다운 경쾌함이 있었고, 자본이 무대미술과 영화미술에 아낌이 없으면 얼마나 화려한 화면이 만들어지는지 유감없이 보여줬다. 눈도 즐겁고, 가창도 좋고. 스토리 속에는 종종 저변에 냉소주의적 면모가 있는 인간관계 묘사도 있었다. 갈등도, 화해도, 반전도 골고루 든 서사.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엔터테이닝한 영화를 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울었다. 숨을 쉬기 어렵게 울음이 차오른다는 기분을 그때서야 알았다. 엘파바의 이야기에 나를 투영했던 것 같다. 나 아닌 다른 인물의 이야기에 나를 투영하고서야 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는 동안에도 생각했다. 나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지나간 나에 매여 있구나. 나는 아직도 지금에 살지 못하는구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로, 제법 멀리 와 있는데도.


엘파바가, 이해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꿋꿋한 태도로 버텼듯이, 나도 버틴 적 있다. 엘파바의 춤을 글린다가 함께 추어 주듯, 그런 이해를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다. 개성으로 배척당하는 게 힘들거나 두려운 적 있고, 친구에게 동화되다 부화뇌동한 적 있다. 따라하려다가 나의 고유성을 잃을 뻔한 적 있다. 구원을 바란 적이 있다. 바라서 믿은 적 있다. 기구를 탄 마법사을 만나는 순간, 엘파바가 느낀 실망처럼, 나 신앙도 버리고 모든 믿음이 모래처럼 사라진 적 있다. 나는 사람과, 다른 여러가지와, 여러 모로 헤어졌다. 엘파바가 모든 것과 작별하고 빗자루를 탈 때, 정작 엘파바는 결연한데 나는 엘파바가 작별하는 모든 것을 떠올리며 울었다.


물론 엘파바는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고, 다부진 의지가 있으므로, 나와 다르다. 나는 형편없었다. 지금도 나는 나를 용서하지 않고, 그저 책임지려고 노력한다.

내가 얼마나 매몰찼는지, 얼마나 황폐했는지, 내가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시작도 끝도 없이, 언어도 없이 생각할 수 있다. 오래 생각할 수 있다.

 

<Defying Gravity>. 그 아름다운 노래를 불순한 마음으로 듣는다. Look at her, she's wicked, kill her!

왈칵, 그녀를 죽이고 싶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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