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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경 Aug 17. 2023

이현정1

이현정


   여태까지 살면서 감이 좋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이건 감이 없는 사람조차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질질 흘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기 쉬워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알기 쉬운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할까. 


   하늘은 맑고 눈은 부시고 기분은 형언할 수 없이 뒤틀린 채로 이현정은 지하 주차장 입구 앞에 서서 김두리의 오피스텔을 올려다봤다. 카메라라도 달아야 하나.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이현정은 손등으로 뺨의 열기를 눌러가며 천천히 담배를 피운 뒤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혼테크라 불러도 할 말 없지만, 결혼은 결혼이었다. 남편과 아내가 될 사람으로서 서로 맡은 바 책무를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 여차하면 계약서를 무기로 쓸 수도 있다. 결혼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각도에 따라서는 계약 관계라 볼 수도 있는 것은 바로 그 계약서 때문이었다. 이현정과 김두리 사이엔 일반적인 혼전계약서와는 조금 다른 양식의 계약서가 존재했다. 이현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문의 짧은 구절처럼 자신이 지불해야 할 금액을 떠올렸다. 물건에 정해진 값을 지불하면 정당하게 소유권을 갖게 되듯 관계에서도 그 룰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마땅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구태여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으면 도통 알아듣질 못하는 것 같으니 이를 어쩐다. 이현정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핸들을 두드렸다. 유책 사유 만들지 않기. 김두리가 벌써 조항을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애초에 지킬 마음 따윈 없었나. 감히?


   조만간 뭔 일이 터질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넌 뭘 좀 아니?

   헐겁게 닫아둔 아이스박스는 조수석의 안전띠에 단단히 매인 채 묵묵했다. 이현정은 혼자 있을 때면 말을 참기가 어려웠다. 연극을 하던 때의 습관이었다. 사물에 말을 거는 것. 그리고 답하는 것. 

   그 새끼 바람피워요. 내가 다 봤어. 

   이현정은 고개를 작게 까닥거리며 불안에 질린 새된 아이의 목소리를 냈다.

   의사들은 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이현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도리질을 친 뒤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너무 공격적이었어. 이해를 갈급하는 톤으로 다시.

   의사들은, 다 그래?

   이제야 만족스러웠다. 

   이현정이 진짜 부자들 사이에서 격차를 느낀 건 다름아닌 언어와 어감이었다. 그건 숫자와 달리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타고난 헤리티지니까. 


   아빠가 차근차근 말아먹은 사업을 엄마가 단숨에 일으킨 건 고작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처박혔던 삶의 질이 고공 상승했다. 좋은 집, 좋은 차. 하지만 명품 옷과 가방이 모든 걸 가려주진 못했다. 싸구려 섬유유연제가 익숙한, 코로 맡을 수 있는 세계의 지층이란 얼마나 좁고 얕은지. 다행히 이현정은 습득이 빠른 편이었다. 역시 연극이 도움이 되었다. 이현정은 사교모임이라면 규모에 상관없이 참석해서 그들의 관심사를 시작으로 정계와 연예계의 추잡한 뒷소문을 익혔다. 사교계는 전혀 다른 어법과 문법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들은 추잡한 이야길 추잡하지 않게 했고 불쾌한 상황에서조차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음미하는가 하면, 손가락 하나로 누군가의 인생을 갱생 불가의 나락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힘으로부터 파생된 애티튜드였다. 이현정은 그것을 훔칠 순 없었으나 간신히 따라 할 수는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무신경한 성골 몇을 속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이현정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가능하다면 자신조차 속이고 싶었다. 그러려면 진짜가 필요했다.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가지고 태어나 쥘 필요조차 없는 것. 헤리티지에 가까운 것. 그래, 예를 들면 의사 남편 같은. 하지만 진짜여야 했다. 운 좋게 타고난 공부 머리로 가난한 집안의 기대주로 부상하는,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닌 ‘의사 집안에서 나고 자란 진짜 의사’. 그게 이현정이 생각하는 헤리티지에 부합했다. ‘의사 남편’은 이현정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한 관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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