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7화 그는 나를 설계하려 했다.

새로운 도전

by 마음을 잇는 오쌤
오쌤 인생 여정맵








새로운 등장인물






주 부장 (LEVEL 1)

“열심히는 하지 마요. 그냥, 버티면 돼요.”

말은 조용했지만,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타협으로 만든 세상 속에서

자기 방식대로 살아남은 사람.

그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나를 끌어넣었다.









이직의 기회


이직은 결심보다 조건이 먼저다.
결심이 아무리 뜨거워도 조건이 차가우면 돌아서게 되고,
조건이 아무리 나빠도 결심이 단단하면 떠나게 된다.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직을 결심한 건 분명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를 증명했지만, 회사는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 역시 회사에 미련이 없었다.
단지, 나 혼자…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예전 직장 동료. 나는 그를 ‘주 부장’이라 부른다.

“오쌤, 우리 회사에서 사람을 찾고 있어.
근데 그 일… 오쌤이 하면 딱일 것 같아서 말 꺼내는 거야.”

처음엔 그냥 반가웠다.
누군가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봐준다는 게 고마웠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그의 말은 ‘디자이너’가 필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땜빵’이었다.



“여긴 한 테라라는 회사야.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포지션은 기구설계 일이야. 디자인은 하면 안 돼.

일은 단순해. 도면 몇 장, 서류 몇 장. 회의도 없어.

그리고 열심히 하지 마. 인정받을 생각도 하지 말고.

잘하려 하지도 마. 그냥 버텨.

그러다 사업 준비가 되면, 그때 나가.

향후 5년 이상은 끄떡없는 회사니까.”


그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회사를 추천하는데, 일하러 오라는 게 아니라
‘버티러 오라’는 말 같았다.

기대도, 가능성도, 목표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안정된 침묵 속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는 말없이 들었다.

그의 말은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했다. 마치 "그게 세상의 이치"라는 듯이.


나는 생각했다.
“사실, 설계를 배우고 싶었으니까…
설계한다고 디자이너가 아닌 건 아니잖아.”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직 결심


“할게요. 입사하겠습니다.
마침 설계일을 배우고 싶기도 했고… 잘 됐어요.”





입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이력서를 보내고, 상무와 면담하고.

연구소장은 말했다.

“어디 다른 데 가기 전에 빨리 입사시키세요.”

사장은 나를 힐끗 보더니 중얼거렸다.

“오, 젊은데…”

그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젊은 나이는 아닌데.’

젊어야 한다고 믿고 싶은 것 같다.
그 믿음을 입은 나는,
경력이지만 설계를 모르는 중고품.
그게 지금의 나였다.








입사


입사 첫날,
주 부장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며 인사를 시켰다.

나는 말수가 줄었고, 표정도 무거워졌다.
그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만든 구조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입사 후 3주 동안
주 부장은 “아직 인사 다 안 끝났다”며
저녁마다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건 환영이라기보다,
현실을 잊게 만드는 의식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비우고, 웃는 척을 했다.
그 사이사이, 생각이 떠올랐다.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 해.’


그 말은 나를 위한 조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자기 자신에게 되뇌던 주문이었을까?

나는 그의 설계한 세계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그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생존 방식에
나도 동참한 셈이었다.

그는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의 ‘온도’를 기억한다.

그 안에 깔린 무기력함과 포기.
그리고 그 안에, 겨우 남은 약간의 배려를.



그렇게 나는 그의 설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이루기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해서 이곳에 들어온 거였는데…
이 길을 설계한 사람은 과연 그였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스스로 전 직장을 포기하고,
타협하며 만든 핑계는 아니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설계를 배운다는 명분 아래

나는 지금,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다음 편 : 18화 단순하게, 복잡한 사람)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keyword
이전 16화16화 나는 떠나기 위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