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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는 찐따였고, 왕이기도 했다.

나는 잘했었다.

by 마음을 잇는 오쌤

사는 집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정 형편 때문이었을까.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나는 여전히 찐따였다.

공부 못하지, 운동 못하지, 말도 잘 못하지.

교실에서는 그야말로 공기 취급.

존재감 없는 애, 그냥 있다가 조용히 집으로 가는 애.







근데 웃긴 건, 오락실만 가면 판이 뒤집혔다.

스트리트 파이터, 용호의 권, 사무라이 쇼다운, 킹 오브 파이터, 모탈컴뱃…
게임 기계만 잡으면 내가 왕이었다.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넣으면 하루 종일 앉아 있었으니까.
도전자는 끊이질 않았고, 오전 9시 오픈부터 밤 9시 폐점까지 내가 자리를 지켰다.

조이스틱 잡는 순간, 머리는 필요 없었다.
손끝이 먼저 움직이고, 몸이 반응했다.
콤보가 터지고, 상대가 쓰러지고, 관중이 웅성거렸다.
그때만큼은 ‘내가 누군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오락실 사장님은 날 “삼전동 류”라고 불렀다.

“이 동네에 류가 산다니까?”

그 별명이 처음엔 우스웠는데, 점점 내 진짜 이름처럼 들려왔다.


“쟤가 그 류래.”
“쟤 이겼다고? 거짓말 치지 마.”


심지어 송탄에서 어떤 형이 날 꺾겠다고 시외버스를 타고 일부러 찾아온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이없지만, 그땐 충분히 그럴만했다.
나는 삼전동 현대오락실의 전설이었으니까.

연승을 이어가는 게 내 방식의 대답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뒤에서 누군가가 무심하게 말했다.

“야, 쟤 진짜 잘한다.”


그 단 한마디가 내 인생을 흔들었다.
존재감 없던 내가, 누군가에게는 기다려지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림 잘 그리는 주현이가 말했다.


“야, 만화반 같이 가자.”


솔직히 별 기대 없었다. 그냥 끌려갔을 뿐이었다.
근데 세상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 머리 안 아픈 수업,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작업.
그 모든 게 나한테 딱이었다.

선을 긋고, 말풍선을 넣고, 캐릭터 표정을 찡그리게 그리다 보면 시간은 순삭.
수학 공식 외우는 것보다 백 배는 재밌었다.

어느 날은 북한 핵과 경제 불안을 주제로 만평을 하나 그렸는데,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말했다.




“야, 너 이거 소질 있다.”


순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살면서 그런 말, 처음 들어봤다.
그때부터 그림은 장난이 아니라 내 대답이 되었다.









나는 집에서 낑낑대며 원고를 그리고, 출력소에서 프린트해 와 스테이플러로 찍어 묶었다.
그렇게 만든 자작 만화책이 세 권.
허접한 복사물이었지만, 그 안의 세상은 내 진심이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나. 제일 강했다.
내 친구들도 캐릭터로 등장했는데, 친한 순서대로 전투력이 달랐다.
누가 2위고, 누가 3위고…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공부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림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내 거였다.
스테이플러로 찍어낸 그 얇은 책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투명 인간이 아니었다.

그림 앞에서는, 찐따가 아니었다.
그게 내가 세상에 대답하기 시작한 첫 장면이었다.



(다음 편 : 3화 실업계로 간 이유.)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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