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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Jul 25. 2022

<水녀-10> 생각만으로 귀찮아


생각만 했는데 벌써 귀찮음이 정수리까지 올라온다. 남은 시간 2시간. 이제 슬슬 일어나서 샤워도 하고 머리 감아야 하는데. 생각만 30분째다. 머릿속에는 몸에 비누 칠도 하고 머리도 시원하게 박박 감고 있는 내가 있다. 생각만 하다가 과감하게 샤워를 포기한다. 그래. 30분만 더 누워 있다가 딱 머리만 감고 나가자. 어차피 샤워했는지 안 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



이러다 결국 1시간이 지난다. 나는 깨끗함을 포기한다. 어젯밤부터 생각해둔 코디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입고 있는 츄리닝에 캡이 잔뜩 구겨진 야구모자 하나를 대충 챙겨서 집을 나선다. 3분만 지체했어도 약속 시간에 지각할 뻔했다. 하지만 과감한 결단력으로 나의 청결함을 버린 덕분에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약속이 먼저지. 이런 내가 대견하다.



요즘에는 생각만 해도 귀찮아지는 것들 천지다. 나에게 원탑은 미용실 가기다. 대학생 때만 해도 앞머리가 길었다 싶으면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아무 미용실에 들어갔다. 그때는 3000원만 내면 ‘발리에서 생긴 일’ 속 하지원의 일자 앞머리를 뚝딱 만들어줬다. 요새는 앞머리만 잘라도 1만 5000원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예약 없이 함부로 미용실 문을 열기가 뻘쭘하다.



미용실 문을 열자마자 내가 입을 열기도 전 오색찬란한 머리 색을 가진 앳된 스텝들 3명이 몰려와 첫 질문을 한다. “예약하셨어요?” 예약을 못 했다는 수줍은 나의 대답 다음엔 웨이팅 공격이 들어온다. “예약 안 하시면 커트밖에 못 하세요. 그리고 1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해요.” 머리 좀 만지고 볶고 하려는데 최소 일주일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카카오 헤어숍과 네이버 예약 홈페이지를 켜고, 아득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성비는 좋되 뽀글 머리만큼은 피해줄 미용실을 찾아 헤맬 생각을 하니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게 된다.



또 하나를 꼽자면 아이스크림 사러 가기다. 잠옷을 벗고, 겨울처럼 잠옷 위에 롱패딩 입기 치트키가 불가한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 대충 반바지에 티를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최소 5분을 걸어 편의점까지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난 분명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아, 귀찮아’가 육성으로 터져 나온다. 이 귀찮음 때문에 한동안은 반강제적으로 배민 배달이 되는 배스킨라빈스 파인트만 죽어라 먹었던 적이 있다. 그러다 친구의 ‘배민 마트’ 대안을 수용해 이제는 집에서도 월드콘과 붕어싸만코를 발가락 하나 안 움직이고 쟁취할 수 있게 됐다.



오늘 저녁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저 비를 뚫고, 무거운 수영복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수영장에 가는 모습을 그려봤다. 이미 내 바지는 빗물에 젖어 질척이고, 바지 주머니에도 물이 들어와 수영장 회원 카드도 축축하다. 탈의실에서는 물에 젖은 옷들을 낑낑대며 벗겨낸 뒤 샤워실에 들어가... 한도 끝도 없다. 수영이 끝난 뒤에는 소나기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영복과 수건, 젖은 가방을 정리할 생각을 하니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럼에도 수영장에 갔다. 이 내용이 이어져야 글이 완성되려나? 하지만 가지 않았다. 귀찮음에 나의 의지를 반납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저번 달부터 생각만으로도 귀찮고, 또 생각에 다다르는 과정도 귀찮은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내 머리 길이는 허리에 다다르기 직전이고, 배민 무료 배송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3만 원씩 구매했기 때문에 내 치아는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고, 다음주 오랜만에 간 수영장은 나를 또 밀어낼 것 같다.



그런데 기분이 좋다. 침대에 누워서 내리는 소나기를 무념무상으로 바라본다. Oscar Dunbar의 Spring Rain, Rachael Yamagata의 No direction을 듣는다. ‘귀찮아’ 이 세 글자에 나의 온 저녁, 그리고 이어진 밤까지 반납한 오늘 하루가 나쁘지 않다. 내일 출근길에, 다음 주 회의 시간에, 특정할 수 없는 언젠가에 오늘을 생각하면,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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