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주도하고 싶었던 어린아이
처음 방 꾸민 날을 기억하나요? 저는 기억해요!
초등학교 3학년, 우리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거실과 주방을 가로질러 안방 맞은편에 위치한 작은 방을 배정받았다. 책상, 침대, 5단 서랍장 그리고 피아노, 4개의 가구가 네모난 방 각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0살 아이에게 주어진 5평 남짓 크기의 방과 4개의 가구. 집주인은 아니지만 '방주인'으로서 주인의식이 생겨났다. 이 커다란 세상에 처음으로 내게 주어진 자그마한 세상이다. 내게 꼭 맞은 옷으로 만들고 싶었다.
건축업 하는 아빠와 오빠 덕분에 집에는 도면과 캐드용 자 등이 널려 있었다. 볼 줄도 모르면서 아빠가 골똘히 도면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쳐다보곤 했다. 각종 선들로 이뤄진 흑백의 그 종이가 진짜 건물이 된다니, 그저 신기했다. 초등학생이었지만 아빠와 오빠는 내게 지나가는 말로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다.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 도면에 전기 선과 배수 라인이 있고, 여기가 문이고 통로는 이쪽으로 나는 등 설명해 주면 구현된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정확히는 잘 몰라도 분명 도면을 이해하는 직관력이 길러진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린 나는 도면을 볼 줄 안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이가 이해하든 말든 뭐든 설명해 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는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그걸 흡수해 버리니 말이다.) 이 능력은 훗날 새로운 카페를 론칭하는 업무를 맡았을 때 빛을 말한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도면을 보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들과 소통하며 동선을 수정 요청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10살의 어린이는 도면을 통해 100분의 1의 개념을 알게 된다. 작은 종이에 큰 건물의 수치를 다 담기 위해 동일한 비율로 모든 수치를 줄인다는 걸 말이다. 나름대로는 도면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고, 나도 도면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번져갔다.
연습장을 펼쳐 첫 도면 작업을 시작한다. 방과 4개의 가구를 줄자로 쟀다. 이를 동일한 비율로 줄여 노트에 문구용 자로 슥슥 그려 넣었다. 그리고 4개의 가구를 여기 배치, 저기 배치하며 최적의 동선을 구상했다. 문을 열자마자 피아노가 보이도록 배치하고, 침대는 문 반대편 벽에 가로로 붙였다. 문의 왼쪽 벽에는 책상을 놓았다. 문을 열었을 때 등이 보이는 것보다, 문과 마주 보고 있을 때 성취욕이 높다는 걸 어디에서 봤다. (어디에서 그런 걸 봤지...?)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여 방 구조를 설계했다. 이제 배치를 바꿔야 한다. 각 가구의 모서리마다 수건을 두껍게 깔아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물론 피아노 바퀴 자국은 선명하게 남아버렸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동선이 나왔다.
정리, 정돈에 대해선 아무런 지식과 경험이 없었던 10살 아이의 방은 아주 지저분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살지 않고, 나의 방을 주도적으로 설계했다는 만족감이 아주 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행보에 별로 놀라워하지 않은 우리 식구들도 정말 대단하다.
10살 아이의 첫 방 꾸미기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집에 대한 탐구 정신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다음은 집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 일생일대의 계기를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