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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씨 Sep 24. 2024

올블랙 기초반에 노란색 수영복의 등장이라.

나의 첫 수영복 간택기.

비장하다 비장해. 이보다 더 비장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이렇게 비장했던 게 언제였더라.

얼마 전 퇴사할 때도 이 정도의 비장함은 없었다. 그저 환장하게 피곤했을 뿐.

뭔고하니 나의 첫 수영복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방금 웃었다면 조금 서운하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진지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비장하다. 하지만 웃었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얼마 전 나의 '첫 수영복 간택기’를 들은 친한친구마저도 처음 뱉은 말이 ‘환장하겠네’였으니. 고작 수영복 하나 고르는데 비장할 게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많아진다. 이 비장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십년쯤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새학기 전 가방을 쌀 때부터 발현되었달까. 유치원가방이야 거의 엄마와 선생님께서 열고 넣고 닫아주시니 나야 메고 오간 일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는 다르다. 그 시절에도 필통에 넣는 연필, 지우개, 형광펜은 물론이고 그림이 있는 자로 살까 투명한 자로 살까를 고민하던 어린 내가 있다. 문구점에 쪼그려 앉아 공책을 한 권 한 권 고르고 스케치북 앞표지를 고르는 나였다. 스케치북이야 결국 하얀 도화지 모음집이요, 도화지를 쓰려면 표지가 어떻든 넘겨야 하는데도 나는 그런 작고 무용하고 별거 아닌 것들에도 이유가 필요했다. 반드시 내 맘에 드는 것으로 골라야 했다. 그러니 나에게 그냥, 대충, 아무거나 사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사전에 무턱대고, 무작정, 홧김에라는 단어는 여태껏 없었으니까. 갑자기 수영장 등록을 했던 그날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일단 검색해본다. 여성 원피스 수영복. 초보 수영복. 수린이 수영복. 무수한 수영복 속에서 놀랍게도 딱 맘에 드는 것이 없다. 아니 왜 죄다 검은색이지? 작전을 바꿔본다. 이때만 해도 아는 수영복 브랜드라곤 아레나와 배럴이 전부였다. 아레나 여성 원피스 수영복. 배럴 여성 원피스 수영복. 검색결과는 여전히 검은색이거나 등산복만큼 화려하거나 그도 아니면 팔다리만 자른 반팔 해녀복이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라니. 정녕 새까만 것과 무지개 중에서 골라야 한단 말인가. 물론 영화나 미드에서 본 수영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게 뭐람. 잠시 당황했지만 구매작전을 완전히 바꿔본다. 나처럼 올블랙도 무지개도 싫은 수린이가 있을 거야. 역시는 역시였다. 운 좋게 나 같은 블로거들이 많아서 은혜롭게도 수영복부터 필수 준비물, 마음의 준비(?)까지 요목 조목 정리되어 있었다. 하물며 유튜브에는 다양한 수영복 비교부터 착용감과 장단점을 알려주는 영상이 하루에 다 보기 힘들 만큼 많았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바로 수영계의 무신사, 가나스윔*이다. 모든 수린이들이여, 일단 여기부터 보시라! 수영복 브랜드가 이렇게나 많구나 싶은데 그 수영복들이 한데 모여있다. 수영복은 물론이고 수모와 수경, 수영가방과 수건까지 수영을 시작할 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찾고 구매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대체 어떤 수영복을 골라 입고 갔는지, 첫 수업은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첫 수업은 가지 못했다’로 시작해야 한다. 여러분 허탈하시죠? 저만큼 허탈하실라구요. 불과 얼마 전, 무려 반차에 택시까지 타고 가서 등록해 놓고 첫 수업에 못 간 이유는 어이없게도 ‘수영복이 없어서’다. 방금 전까지 주구장창 수영복 얘길 해놓고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하면, 시간을 더 거슬러 퇴사 말미 즈음으로 가야 한다. 그즈음 퇴사를 하긴 할 수 있을라나 싶을 만큼 환장하게 바빴던 나는 야근과 출장 콤보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쁜 수영복을 찾을 때마다 캡처해 놓고 구매처 링크도 저장해 놓았다. 그렇게 나름의 8강 토너먼트를 거쳐 주문 완료. (정말이지 치열한 결승이었다. 그때 결승후보였던 다른 수영복 하나가 아직도 눈에 밟힌다.) 그 바쁜 와중에 이 정도의 부지런함을 발휘했는데도 내가 놓친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공휴일이었다. 하필 삼일절 공휴일이 금요일인 바람에 수영복 배송이 늦어진 것이다. 당장 월요일이 첫 수업인데 고심 끝에 고른 나의 첫 수영복이 화요일에나 오게 생겼다. 아무리 배송조회 화면을 새로고침해보아도 나의 수영복은 그 유명한 옥천허브에 멈춰있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수영복을 골랐냐고?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한 노란색 수영복.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나리 노란색 바탕에 주황색 꽃과 토끼 그리고 하얀 민들레와 초록 잎사귀가 가득한 수영복이다. 한눈에 봐도 귀엽고 다시 봐도 귀여운 수영복이다. (물론 내눈에만) 흐름상 두 번째 수업은 어땠는지가 나와야 하는데 애처롭게도 두 번째 수업도 가지 못했다. 또 어째서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래서 가임기 여성들은 매달 10% 할인을 받는다. 할인받고도 이렇게 슬플일이라니. 그렇게 첫 주 세 번의 수업이 몽땅 지나가고나서야 네 번째 수업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첫 수업 가던 날이 아직도 너무 생생하다. 일주일 전부터 싸놓은 가방인데도 몇 번이고 확인하고나서야 집을 나섰다. 우리 동네 수영장은 걸어서 20분. 어찌나 설렜는지 3월 초라 아침 공기가 찼는데도 이마에 땀방울을 달고 15분 만에 도착했다. 삑! 회원카드를 찍자 한 달짜리 유효기간 옆에 내 이름이 뜬다. 내가 진짜 수영장에 왔어! 설레는 심장을 멈춰 세운건 바로 그다음 장면이다. 수영장에 들어서기 전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는데 이걸 미처 몰랐다. (이건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바로 라커룸과 샤워장. 9시 반 수업이라 넉넉히 9시에 도착했는데 라커룸 안은 이미 전쟁이었다.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나체가 되는 동안 당황한 나는 빈 라커를 찾아 한참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더 큰 전쟁이 있다는 것을. 샤워장 안은 이보다 훨씬 격렬하고 뜨거운 전투의 현장이었다. 쏟아지는 물줄기 앞으로 씻는 사람과 씻은 사람과 줄 선 사람이 뒤엉켜 서있기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물론 나체로. 남이 씻고 있어도 나체로 서서 기다리고 내가 씻는 동안에도 내 앞에 누군가 기다린다. 역시 나체로. 새삼스럽지만 굉장히 당황스럽다. 목욕탕과는 사뭇 아니 완전 다른 현장이다. 샴푸병을 두 번이나 떨어뜨렸다는 것 말고는 무슨 정신으로 샤워를 마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놈의 귀여운 수영복은 왜 이렇게 또 안 입어지는지 (집에서 두 번이나 입어봤는데 그때는 분명 잘 입었는데.) 결국은 양 옆의 어머님들이 사이좋게 어깨끈을 당겨 주셨다. 분명 가릴 데 다 가렸는데도 헐벗은 듯한 느낌이 안 그래도 추운데 나를 자꾸만 움츠러들게 했다. 아직 수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몇 번이나 당혹스러운지. 그렇다. 아직도 오늘치 당혹이 남았다.


나의 첫 수영복. ⓒ 아씨


두 번의 전쟁을 치르고 자꾸만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쭈뼛쭈뼛 드디어 수영장에 들어섰는데 어라? 기초반 팻말이 놓인 레인은 온통 검정. 정말 올블랙 그 자체. 모든 사람들이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굳이 다른 색을 찾자면 검은 검은 수영복에 하얀 로고라던가, 수모의 그림 정도. 파란 건 물이요, 검은 건 사람이니 우리는 이것을 기초반이라고 부른다-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귀여운 나의 노란 수영복에 순식간에 수많은 눈동자들이 꽂힌다.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질문들이 날아와 꽂힌다. 우리 반이에요? 오늘 처음 왔죠? 못 보던 수영복이네! 우리가 지난주에 뭘 배웠냐면~. 네, 제가 오늘 처음 왔습니다. 이런저런 애달픈 사연들이 있었고요. 그러게요 저만 노란색이네요. 무늬도 저만 있네요. 관종은 아니고요. 그냥 귀여운 걸 많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쯤 되면 검은색으로 살걸, 후회되지않냐구요?

그럴 리가요. 아무리 봐도 귀여운 저의 첫 노란색 수영복인걸요.

지금도 제가 가진 수영복중에 귀여운 걸로는 1등입니다.




*가나스윔: https://www.swim.co.kr/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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