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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씨 Sep 27. 2024

수영장 물 안에서 우린 그저 모두 '회원님'.

나이나 직업을 몰라도, 동기나 목적이 달라도 전부 다 상관없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이런 장면이 있다. 최우식 배우가 부잣집 딸을 가르치는 영어 과외 선생님으로 나오는데 첫 수업에 학생에게 이런 말을 한다. “모든 건 결국 기세야, 기세.” 그렇다. 기세라고 했다. 생애 첫 수영 수업을 앞둔 나의 기세는 한마디로 노란색 수영복이었다. 등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과연 내가 얼마나 오래 배울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컸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컸던 도전이라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면서도 환불 규정은 어떤지, 위약금은 얼마인지 꼼꼼하게 살폈다. 동시에 몇 번이나 입을지 모르는 거 이왕이면 맘에 드는 수영복으로 입겠어!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원래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후에 이 얘길 들은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같은 말을 했다.


-있잖아. 대부분의 사람은 말이야, 몇 번 안 할 것 같으면 대충 싼 거 사. 급하게 쿠팡에서 시키던가. 

-이미 넌 꽤나 열정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임한 거 아니야?

-의식하지 못했어도 아마 너 스스로는 알았을걸? 머지않아 수영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 저편에 수영에 애정이 생기면 좋겠다는 깊고 짙은 바람이 있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것까진 욕심이니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애정이 싹트기만 하면 좋겠다고. 일단 싹만 보이면 물을 주고 볕을 쪼이는 건 내 몫이고 그건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다시 첫 수업 이야기로 돌아와서. 수업을 세 번이나 빠졌는데도 나의 노란색 수영복이 뜻하지 않게 너무 튀는 바람에 우리반 회원분들이 지각생인 나를 알아봐 주셨고 괜히 한마디씩 걸어주신다. 멋쩍은 나를 배려해 주시는 것이리라. 그리고는 우리가 뭘 했냐면 하시더니 속성으로 지난주 수업을 읊어주신다. 물속에서 숨 쉬는 연습과 (그 유명한 음-파) 벽 잡고 발차기를 했다며 손수 보여주신다. 해보라며 한번 더 선을 보이신다. 부끄러움은 잠깐이요, 이미 몸은 알려주시는 대로 흉내를 내고 있다. 대충 봐도 손녀뻘인 나에게 이렇게 해봐요, 잘하네요, 수영을 해봤어요? 하시며 본인 앞에 서라 하신다. 모든 할머니들은 남의 손녀에게도 이렇게나 관대하시고 따뜻하시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간단한 준비운동이 끝나면 다 같이 박수를 치며 일사불란하게 자기 반으로 흩어진다. 우리 동네 수영장은 국제 경기를 치렀을 정도로 꽤나 크고 레인도 여러 개인만큼 사람도 많다. 내 수업은 9시 반, 새벽수업 이후 아침 첫 수업이다. 이 시간에 수업만 11개 회원은 어림 잡아도 350명인 셈이다. 내가 출근해서 막 업무를 시작할 시간인데 이때 수영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어라 그런데 나도 여기 있구나라는 생각에 수영의 맛보다 퇴사의 맛을 먼저 느낀다. 달콤하다. 막상 퇴사하고 출근을 안 하면 어딘가 이상하고 적적하다는 사람도 있다던데 확실하게 나와는 다른 부류다. 방금 박수를 쳤는데 또 박수가 나온단 말이지.


바로 그때 해녀복 아니 해남복인가, 전신 수영복을 입은 강사님이 우리 레인을 향해 걸어오신다. (역시나 검은색. 아니 강사님마저!) 마음의 소리가 요동친다. 강사님 제가 일주일이나 빠졌는데요, 혹시 지각생을 위한 복습 같은 게 있을까요, 제가 수영은 완전 처음이라서요, 그건 그렇고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끝나기도 전에 강사님이 수신호를 하신다. 양팔을 나란히, 다시 한 손으로 앞을 가리킨다. 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나만 빼고 모두 알아들은 눈치다. 수신호의 의미는 바로 '킥판 잡고(양팔 나란히) 출발(한손으로 앞을 가리킨다)'. 아니, 강사님! 저는 오늘 처음 왔다니까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일단 맨 뒤로 가려는 나를 턱!하고 붙잡는 손. 속성 복습을 시켜주신 회원분이다. 가긴 어딜 가요. 일단 해봐요. 내가 도망갈세라 얼른 킥판 하나를 건네주신다. 일단 양손으로 킥판 끝을 움켜잡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엎드려본다. 어? 뜬다? 아니다 가라앉는다. 앞사람처럼 전방을 향해 발차기 발사.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양발을 위아래로 미친 듯이 차 본다. 오? 뜬다! 이번엔 진짜 뜬다. 간다! 여러분 제가 물에 떴어요! 물에 뜬 것도 신기한데 제법 떠 있어요. 앞으로 가긴 가요! 놀랍게도 첫 수업의 기억은 이게 전부다. 아니지, 수업이 끝나고도 샤워장은 또 한 번 전쟁이었다는 거. 


그다음 수업도 다다음 수업도 비슷했다. 킥판과 한 몸이 되어 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반 회원들의 얼굴이 하나둘 익숙해진다. 주고받는 인사가 조금씩 늘어간다. 일찍 도착해도 쭈뼛거리기보다 얼른 물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눈다. 입을 때마다 어색했던 수영복과 킥판이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전쟁 같은 샤워장에서도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만큼 우리반 회원님들끼리도 친숙해진다. 일주일에 수업 세 번, 자유수영까지 합하면 꼬박 네다섯 번씩 만나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직업은 뭔지, 결혼은 했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봐도 손녀뻘이고 딸뻘이지만 함부로 말을 낮추지도 않는다. 처음 만나면 으레 묻고 답하는 질문 대신 수영은 처음인지, 왜 배우는지, 호흡은 조금 편해졌는지, 왜 엊그제 안 왔는지를 묻는다. 나처럼 수영이 처음이신 분, 오래전에 배웠지만 다시 시작하신 분, 다이어트 때문에 배우시는 분, 관절에 무리가 덜 가서 배우시는 분, 나처럼 퇴사하고 오신 분, 휴직하고 오신 분, 오후 출근 전에 오신 분, 아이 어린이집을 보낸 후에 오신 분,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여 적적하여 오신 분, 호텔 수영 정도만 해도 좋겠다는 분, 손녀와 물놀이를 하고 싶어 오신 분, 접영까지 배우는 게 목표이신 분. 성별도 연령도 동기와 목적도 다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물 안에서 수영하는 우린 그저 모두 회원님이다. 수많은 직함과 애매한 호칭 따위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교복 입은 애만 없으면 제일 어린 축에 속하니 어딜 가나 제일 먼저 호구조사의 대상이 되었는데 굳이 내 신상을 줄줄이 욀 필요도 없다. 유독 초면에 그런 걸 물어오는 그들의 나이와 직업, 사는 동네 따위가 정작 나는 궁금한 적이 없었다. 회사생활에서 불편하지만 익숙해졌던 것들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동안 내 취미생활엔 새로운 살이 붙는다. 이렇게 다른 버전의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이것도, 여기도 엄연히 집단의 일원으로 모여 질서를 유지하는 공동생활이니까. 사실 사회생활의 정의는 이거니까.


자, 모이실게요. 옹기종기 모여든 우리의 뽀얗던 얼굴이 벌게지면 수업이 끝난다. 오늘도 수고하셨고 파이팅하고 마무리할게요. 자, 하나 둘 셋. 파이팅! 우리반 회원님들의 손 하나가 번쩍 올라간다. 이 파이팅은 육성의 힘찬 파이팅이다. 그날 수업이 아무리 고되고 출석한 회원님이 적더라도 이 파이팅은 옆반보다 커야 제 맛이다. 얼마 만에 이런 파이팅을 외쳐보나 싶다. 맞아, 파이팅이란 이런거였지.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남짓 우리의 목표는 같으니까. 어제보다 물에 잘 뜨고 싶고, 지난주보다 강한 발차기를 하고 싶은 마음. 동료보다 가볍고 친구보다는 한 뼘 먼 회원님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아주 오랜만에 생긴 ‘우리반’이라는 소속감이 새삼 든든하고 즐겁다. 


오늘도 하나 둘 셋 파이팅! 회원님들, 모레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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