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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씨 Oct 11. 2024

신생아도 개구리도 평영발차기를 잘한다던데.

어째서 나는.. 어째서! 5월은 평영.

5월은 여러모로 빠르고 특별하다. 일 년 중 자타공인 빨간 날이 제일 많으니 누구라도 한참 전부터 5월 달력을 뒤적인다. 직장인이라면 진작부터 소중한 연차를 어떻게 슬기롭고 짜릿하게 쓸지 고민한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공휴일에 잘 붙여 쓰면 제3의 명절 기분도 낼 수 있다. 올해는 이런 고민을 잠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병가요, 내일은 월차요, 모레는 연차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으니 퇴사자의 봄은 벚꽃이 피던 지던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퇴사하면서 얼마간은 일부러 느긋해지자. 일한 만큼 다른 데 몰입해 보자, 했다. 소위말해 쓰레기 같은 체력부터 쓸만하게 키워보자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수영장에 등록해 버렸다. 당시엔 무작정 저질렀다 싶었지만 그동안 숱하게 꺾인 작정들을 되짚어 보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급발진이었다. 내 기필코 운동을 하리오, 운동부족과 만성피로의 악순환을 끊으리라 ‘다짐’만 했던 작정들. 어쨌든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지 않는 것만으로 등허리 통증이 줄었다. 몇몇 화상을 안 보는 것만으로 정신적 고통을 덜었다. 통증과 고통이 줄어든 자리에 수영장 물이 넘실거린다. 작년과 달리 오직 내 관심사는 수영수업이 있는 월수금에 공휴일이 있냐는 것이다. 제발 아니길 바랐건만 공교롭게도 빨간 날에 수업을 두 번이나 뺏겼다. 이것 말고도 하나 더 빼앗긴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의 생기, ‘자신감’이다. 날씨도 완연한 봄이겠다, 온 대지에 생명력이 차오르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유형, 배영을 지나 평영 수업에 접어든 것이다. 


-강사님 : 다음 주부터 평영 시작합니다.

-(웅성웅성) 아이고 큰일이다, 평영이 어려워. 그게 잘못하면 허리 아프다는데.

-강사님 : 애들요 해요 애들도! 쉬워요 쉬워!


이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다. 애들도 한다는 말. 어린이 수영반도 잘만 한다는 그 말이 얼마 후 비수가 되어 우리 반에 꽂혔다. 평영은 수업시작부터 남달랐다. 되든 안 되는 물에서 시작해 물에서 익혔던 자유형, 배영과 달리 수영 시작 이래 처음으로 뭍에서 익히기 시작했다. 남달리 시작해 유달리 우리를 괴롭혔다. 마치 계곡에 발 담그듯 걸쳐 앉아 하나 둘 셋넷 구호에 맞춰 발동작을 익힌다. 그럼 손은요, 하고 물었더니 일단 발부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다. 평영은 손발을 따로 익힐 만큼 만만치 않은 영법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각오했더라면 달랐을까? 평영은 네 가지 영법(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중에서 가장 물의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만큼 정확하고 부드러운 동작이 필요하다. 특히 하체의 비중이 훨씬 큰 영법이라 발차기를 잘해야만 추진력이 생긴다. 잘하더라도 속도가 제일 느린 영법이다. 느린 대신 얼굴이 규칙적으로 물 밖에 나오니 가장 숨쉬기 편하고 안정적인 수영이라고 한다. 흔히들 아는 호텔 수영, 개구리 수영과 비슷하다. 어쩜 세상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자유형, 배영은 다리가 아프면 팔이라도 써서 나아갈 수 있었다. 물의 저항도 세지 않아 읏차! 하고 힘주면 물살 따위야 이겨낼 만했다. 반면 평영 이 녀석은 발차기가 안돼서 팔로 힘껏 물을 모으면 상체에 힘을 준만큼 가라앉는다. 물은 너무나도 정직하게 잘못 쓴 힘만큼 빠르고 깊게 우릴 끌어내린다. 여기서부터 허우적거리기 시작한다. 숨쉬기는 편하다. 얼굴이 반만 나오는 찰나에 숨 쉬는 자유형과 달리 박수치듯 두 손을 모아 얼굴을 완전히 꺼내면 두 배의 공기가 들어온다. 그런데 문제는 숨쉬기만 편하다는 것. 나머진 죄다 불편하다. 숨은 편하게 쉬었는데 도무지 나아가질 못한다. 발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데 계속 제자리 수영이다. 발차기를 겨우 익혀서 이제 좀 되는 것 같다 싶으면 속도가 안 난다. 


신생아도 개구리도 잘한다는 평영발차기 ⓒ istock


사실 이 무렵 나는 생애 첫 막내생활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소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될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질머리로 자유형과 배영을 수월하게 해냈다. 게다가 주 5일 수영장엘 들락거리니 안늘래야 안늘 수가 없었다. 수업 때는 항상 우리 반 2번으로 출발했다. 강사님도 슬쩍 나에게 처음치고 잘하는 편이라 하신다. 여기에 더해 우리 반 막내라고 회원님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 지칠 리 만무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나처럼 작은 물고기 따위는 그야말로 댄스머신이 되는 것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만큼이나 열기와 생기가 충만했는데 평영을 시작하면서 나사 하나가 빠져버렸다. 일주일쯤 지나면 익숙해져야 하는데, 이주일쯤 지나면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와야 하는데, 이쯤 되면 분명히 해내야 하는데 맘처럼 안된다. 하루는 요령 없이 힘으로만 뒷발차기를 하다 보니 무릎이 아파 로봇처럼 어그적 어그적 걷는다. 또 하루는 어떻게든 숨 쉬러 나오겠다고 상체를 과하게 드느라 허리와 엉덩이가 뻐근하다. 집에 돌아와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유튜브로 자체 보강을 실시한다. 수친들과 단톡방에 하루에도 몇 개씩 영상 링크를 공유하고 자세에 대해 한참을 토론한다. 그러다 어느 날,  보고야 말았다. 신생아가 수영하는 장면을! 목튜브를 껴주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평영 발차기를 해버리던 생후 30일 미만의 아기들을! 현타를 느낀 우리는 시간 맞춰 같이 수영하며 서로의 자세를 봐주고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고 또 연습한다. 어김없이 수업시간만 되면 회원님들 모두 나는 여기가 아프네, 저는 여기가 불편해요, 평영 싫어요, 평영 안 돼요, 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실제로 몇 분은 평영을 시작하면서 반을 옮기셨다. 아파가면서 운동하기 싫으시다고 자유형부터 다시 하신다고. 


수영을 시작하며 맞는 첫 위기였다. 3월,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물론 ‘잘 안 되는 것' 투성이었지만 ‘아예 안 되는 것’은 없었다. 처음으로 안 되는 게 생겨버렸다. 눈에 띄게 풀 죽은 나를 보며 강사님이 한 말씀하신다. 계속 우리 반 선두에 서느라, 지금까지 잘해와서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고. 천천히 하면 된다고. 잘하고 있다고. 쫄지 말라고! 일주일 넘게 지각했어도 몇 달간 우리 반 선두를 놓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부담이 된 걸까.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늘 할만한 것들에 덤볐다. 시작부터 잘할만한 것을 골라 그걸 잘 해내는데 익숙하다. 남들은 하는 것마다 잘한다고 칭찬했지만 스스로는 내가 잘할 것 같은 것만 고른 결과라 여겼다. 소심하고 위험하지 않은 선택과 결과였다. 그러니 덤비는 것마다 평균 이상의 수확을 거뒀고 그 사실이 나에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수영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치 앞도 모르겠는 것을 무턱대고 시작해 본 역사가 없었다. 며칠이나 다닐 수 있을까, 뜨긴 할까 싶었던 수영을 생각보다 재밌게 잘 해내면서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나 보다. 수영선배들에게 물으니 많이들 이쯤에 첫 번째 수태기*가 온다고 한다. 나 말고도 평영 때문에 시름시름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래, 평영이 좀 안되면 어때! 적당히 뜨고 싶었을 뿐인데! 권태기는 무슨, 작은 좌절일 뿐이다. 풀이 좀 죽었지만 5월은 생기 가득 푸르른 봄 아닌가! 죽은 풀도 금세 자라리라. 매일같이 수영장엘 나가면서 그 사이 수영복이 두어 벌 더 생겼다. 마침 푸른 봄에 태어난지라 생일선물 덕을 봤다. 수영선배들이 그랬다. 수영복도 옷이라고, 물옷! 이렇게 매일같이 다니면 여러 벌 두고 번갈아 입으라고. 새 수영복 입는 맛에 수영장에 더 자주 오게 되는 거라고.

 

그때부터 내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있었느니 사도 돼~ 사야 해~ 사~ 사.. 샀다.

그래, 좌절은 새장비로 잊는다. 권태는 오기도 전에 소비로 승화시키자. 이직 탐색 대신 다음 수영복 수색에 나선다. 


그래서 지금 몇 개냐구요? 7개입니다. 럭키세븐이잖아요.

물론 장바구니에도 여러 벌 있긴 한데, 담겨만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리고 이 사실을 저의 엄마는 모르셔야 합니다.

아무리 내돈내산이고, 다 컸어도 있는 걸 자꾸 사면 혼나거든요.

추신: 새장비 덕인지 지금은 자유형 다음으로 평영을 곧잘한답니다. 역시 운동은 장비빨!



*수태기: 수영 권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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