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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씨 Oct 08. 2024

흔들리는 머리 속에서 네 락스향이 느껴진거야.

장비빨 세우는 4월의 배영.

하루는 수영을 끝내자마자 친구를 만났다. 수영을 시작하고나서부터 새로 생긴 병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나 수영 너무 좋아. 좀 들어봐.’ 병이다. 퇴사만으로 뭇 직장인들의 부러움을 샀는데 그보다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곧바로 수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새로 시작한 운동이 예상보다 너무 재밌고, 수영하는 나 자신이 생각보다 꽤 맘에 들어 나 역시 자꾸만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잘하는 건 차치하고 간만에 일상을 파고든 새로운 존재. 그리고 그 것이 가져다주는 신선한 활력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하나를 물어보면 둘을 털어놓는 수린이*이자 수친자*는 그날도 어김없이 열정적으로 수영썰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수영복이 말이야, 한 개로는 안된다니까? 자유형은 있잖아, 호흡할 때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는데 물이 막 들어가거든? 그래서 수영전용 귀마개가 있더라고? 잠자코 듣던 친구가 갑자기 나를 가로막는다.


-왜?

-방금 바람이 내 쪽으로 불었는데.

-그게 뭐?

-너한테 수영장 냄새나.


뭐라고? 나한테? 킁킁. 아닌데? 다시 킁킁. 잠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 익숙한 향기. 하지만 몸에서라기엔 낯선 향기. 락스 냄새다. 다시 말해 수영장 냄새가 분명하다. 먹다 만 해물로제파스타 냄새 사이로 흔들리는 머리 속에서 내 락스향이 느껴진 거다. 샤워장이 복잡해서 대충 씻었나? 약속 때문에 오늘따라 급하게 나왔나? 실제로 사람이 너무 많아 대강 씻는 날이 부지기수다. 그럴 때면 매번 마음의 소리에 기대 본다. 아까 들어갈 때 이미 한번 씻었으니까. 어차피 내일 또 와서 씻을 거니까. 그렇다고 이걸 수린이의 훈장으로 삼자니 썩 내키지도 대단히 좋은 냄새도 아니다. 그 이후로 샴푸와 바디워시를 더 써보고, 한참 헹궈도 보지만 이미 한번 맡아서인지 나에게 자꾸 수영장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수친*들에게도 물어본다. 언니, 나한테 락스 냄새나? 킁킁. 잘 모르겠는데? 킁킁. 언니들 냄새도 맡아본다. 그렇다. 같이 수영하고 나온 사람들끼리 서로 냄새를 맡아봐야 무슨 소용인지. 비슷한 냄새가 나겠지. 냄새가 나더라도 우리끼리는 잘 모르겠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으라 하였느니라. 어라, 자꾸 거창해진다. 삶의 지혜 속에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수영장 냄새를 다른 향으로 덮 것이다. 락스 냄새보다 향기롭고 오래가는 바디로션을 쓰자. 매일같이 수영장엘 다니는데 수영장 냄새를 어찌하리오. 안 갈 수 없으니 대신 다른 향을 내뿜으리라. 킁킁. 성공이다. 지금 내 머리에선 모로칸 오일의 향이, 팔에서는 러쉬의 라임 바운티 향이 가득하다. 남들에게도 그런지는, 아직 확인 전이지만. 


이미 눈치들 채셨겠지만 나는 장비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장비빨 3 대장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육아, 요리, 운동이다. 육아는 경험이 없어 모르겠지만 요리와 운동은 상당 부분 인정하는 바이다. 장비빨이란 보통 ‘없어도 큰 일 나는 건 아니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들’을 논할 때 회자된다. 이를테면 마늘 다지기, 삶은 달걀 슬라이서 라든가 오븐온도계, 소금 후추 전동 그라인더 같은 것들 말이다. 보통 요리과정을 간편하게 해 주고 요리를 더 예쁘게 완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운동 나설 마음을 마구 들게 하는, 하는 동안 이왕이면 더 예쁠 수 있는, 부상을 방지하고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들이 있다. 많아도 너무 많다. 물론 이런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동기부여라느니 예쁘다느니 더 잘된다는 느낌들은 모두 주관적이다. 다만 나는 그 세계에 기꺼이 발을 들이는 편일 뿐. 뭍에서 하는 운동도 장비빨을 세우는데 하물며 물에 들어가는 운동에 어떻게 장비빨을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합리화1) 게다가 새로운 일에 발을 들이면 그와 관련된 새로운 장비가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고수는 장비 탓을 안 한다지만 나는 아직 하수이기에 기-승-전-장비다. (합리화2) 새로 시작한 일이 익숙해지면 장비를 보는 눈이 생긴다. 가진 장비도 다시 보고 없는 장비는 새로 보자! 는 그릇되고 굳센 일념으로 장비 탐색 및 구매에 박차를 가한다. (합리화3,4…) 몇 년 전 필라테스를 처음 배우던 때가 생각난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강사님의 “몸에 좀 붙는 옷이 자세를 볼 때 좋아요.” 한마디에 불어나기 시작한 가지각색의 장비들. 브라탑부터 반팔, 긴팔, 4부 레깅스부터 9부까지 다양하기도 하다. 팔이 짧아서 요가블록, 잔머리가 많아서 헤어밴드, 손발에 땀이 많아 고무돌기가 붙은 장갑과 양말도 샀다. 가지가지 참 이유도 많다. 놀랍게도 실내운동이지만 계절별로 옷과 아이템이 넘쳐난다. 필라테스를 하지 않는 지금도 내 방 곳곳에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아주 안 쓰는 것도 있지만 마사지볼처럼 매일 쓰는 것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역사를 갖고 수영을 시작했으니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초보 주제에 장비 좀 살 수 있지만, 하지 않을 거라면 사지도 않는다. 아무튼 주 5일을 꼬박 수영장엘 나간다. 그만큼 수영장비도 조금씩 늘어간다. 새 물안경, 더 가벼운 수건, 샤워장에서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 가방. 씻고만 오더라도, 잠깐만 하고 오더라도 나서자는 마음가짐 덕인지 자유형을 배운 지 한 달쯤 접어들 때 드디어 안 쉬고 25m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손뼉 치며 첫 성공을 자축하기엔 얼떨결에 와버렸고 다시 느껴보자니 쉽사리 되지 않지만 굉장히 짜릿하고 기분 좋게 소름 돋는다. 아직까지 살결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은 됐다! 드디어 했다!라는 그 느낌이다. 얼마 만에 느끼는 작고 소중한 성취감인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학생이라는 신분과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출퇴근이 시작되면서 무언가 새로 배우겠다는 마음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어렵사리 시작해도 금세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바쁜데 굳이, 피곤한데 굳이, 당장은 필요 없는데 굳이. 사실 반복되는 하루, 지루한 일상에서 나를 지탱하는 건 ‘굳이’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자극인데도 그걸 한참 잊고 지냈다. 해야만 해서 하는 게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무언가, 잘하지 않아도 되는 무언가, 남과 겨루지 않아도,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는 무언가. 말 그대로 남들이 뭐라건 내가 좋아서 몰입하는 무언가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아니, 오랜만에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벅차다.


수영장 냄새를 덮을 러쉬 바디로션 사러간 날. ⓒ 아씨


첫 성공의 뭉클함도 잠시, 수영장의 수업 진도는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다. 3월이 자유형이라면 4월은 배영이다. 배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 반 회원님들 사이에 깻잎논쟁 비슷한 화두가 등장했다. 앞으로 엎드리는 게 편한 사람과 뒤로 눕는 게 편한 사람. 전자는 자유형이 수월하고 후자는 배영이 낫다 한다. 나의 경우 얼굴을 물에 담가야 하는 자유형이 더 무섭다. 차라리 뒤로 눕는 게 편하다. 적어도 눈코입을 내놓고 있지 않은가! 자유형처럼 숨 쉬러 나오기 위해 용쓰지 않아도 된다. 어쨌거나 지난달만큼 적지 않은 난항이 예상된다. 강사님이 배영 출발! 이랬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누웠다 일어났다 금새 아수라장이다. 살며시 누워 출발해도 잘 나갈까 말까인데 잘 될까 싶어 뒤로 콩! 하고 살짝 뛰어 눕는다. 당연히 뛰는 힘에 머리가 물에 잠기고 코에 물이 차니 재빨리 서버린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니 다시 뒤로 콩! 하고 눕는다. 앞을 보며 수영할 때는 앞사람 발이나 물결이 보이는데 천장을 보고 누워서 발차기를 하니 내 발 끝에 뒷사람 머리가 닿거나 경로를 이탈하여 돌아오는 사람 머리와 부딪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모두들 냅다 일어선다. 그리고 다시 콩. 아, 마치 데자뷔처럼 이번엔 두더지게임이 생각난다. 오락실이나 먹자골목 앞에 펀치기계와 나란히 있던 그 고전게임, 두더지. 연달아 콩콩 뛰어오르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매끈하고 동그란 머리들. 수모를 쓴 우리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형하는 점프왕 해마였는데 이번달엔 배영하는 점프왕 두더지인 것인가. 대체 언제쯤 수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는 4월이다.


아, 그 사이 수영장 냄새를 덮으려는 나의 열띤 노력에 힘입어 바디로션은 두 개에서 다섯 개가 되었다. 매일 쓰는데 매번 같은 향은 지루하니까. 그리고 원래 향수보다 바디로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변명같이 들리겠지? 곧이어 새로 알게 된 정보인데 락스 냄새를 제거하는 전용 샤워제품이 따로 있단다. 이름하야 염소 제거 샴푸, 바디워시. 수영인들을 위한 아이템의 축복이 끝도 없다. 구 해마 현 점프왕 두더지도 써보았다. 락스 냄새가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확인하지 못했지만 씻고 나오면 머리고 몸이고 훨씬 부드럽다. 이것만으로도 성공 아닌가. 역시 운동은 장비빨이다.




*수친: 수영친구

*수린이: 수영 초보자를 일컫는 말. 수영+어린이의 합성어.

*수친자: 수영에 푹 빠진 사람을 일컫는 말. 수영+미친 자의 합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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