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내 수영은 멈추지 않으니까.
수영을 다닌 이후로 나의 가장 큰 화두는 수영이요, 퇴사 이후 가장 큰 일정은 수영이다. 하루 일과는 수영장 전후로 분리되고, 약속을 잡더라도 수영 시간이 우선순위다. 수업이 있는 월, 수, 금 아침을 위해 수업 전날은 무리하지 않는다. 너무 늦게 자지도 않는다.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는 건 쉬워도 밤새는 건 쥐약이다.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몸의 리듬이 정확하다. 하루는 새벽에 손흥민 선수 경기를 보느라 늦게 잤더니 다음 날 무거운 눈꺼풀과 몸 때문에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50분 되는 수업을 온전히 채우고 나오지 못하면 아침부터 영 하루가 꼬이는 기분이다. 그만큼 올봄부터 내 일상을 가득 채운 것이 바로 수영이다. 사실 퇴사 후에 여행 안 가냐라던가, 같이 여행 가자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사나흘 놀다 오는 것보다 훨씬 긴 장기여행을 선호하다 보니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출근을 하면 시간이 없어 못 가고, 출근을 안 하면 돈이 없어 못 가는 게 여행이라는데 퇴사 직후가 시간으로 보나 주머니 사정으로 보나 최적의 기회다,라는 것이 주변의 공통된 생각이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지만 호주, 일본, 제주 여행까지 연달아 세 번을 거절했다. 호주 여행은 정말이지 혹했다. 한 이주쯤 떠나서 바다도 보고 햄버거도 먹고 대자연도 잔뜩 느끼고 오자는 친구의 제안을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기어코 거절한 것도 여전히 수영 때문이다. 이제 막 자유형을 배우기 시작한 때라 딱 한번 수업을 빠지는 것도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이 주일이라니, 어떻게 이주일을! 강사님 마저도 이번주는 킥판 없이 자유형 시작하니까 최대한 빠지지 마세요,라고 주의를 준 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스스로 군기가 바싹 들어있는 상태였지만. 모처럼의 멀고 긴 여행을 별 고민도 안 하고 거절하는 나를 보며 친구는 잠깐 실망하다 축하를 건넸다. 여행은 불발되었지만 수영은 이제 막 출발이다.
-너한테 오랜만에 너무 재밌는 일이 생긴 것 같아.
-너 지금 수영이 진짜 좋구나?
무작정 등록해서 다니기 시작했지만 더 무작정 수영이 좋아져 버렸다. 꼭 한 번 배워보리! 벼르긴 했지만 별스러울 만큼 빠져버렸다. 그냥 취미 삼아 하는 운동이라기엔 수영 자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을 때라 배우는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수영이 그냥 취미로 하는 운동이 되려면 이왕 시작했을 때 할 수 있을 만큼 잘 배워 놓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그러니 긴 여행이든 짧은 일정이든 간에 수업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업은 물론, 수업이 없는 날도 수영장엘 나갔다. 튀는 노란 수영복을 입는 우리 반 공식 막내인 데다 연습도 매일 같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반 1번, 2번으로 자리매김했다. 수영 수업에는 정한 것이든 아니든 반마다 서는 순서가 있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각 레인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줄을 서는 순서, 그 순서에 따라 수영을 시작한다. 수영하는 사람들, 해 본 사람들에게 수영 배운다는 얘길 하면 수업 때 5번 안에 서야 운동이 좀 되지, 이왕이면 앞에 서!라고들 한다. 수영을 안 해본 사람들은 대개 안 무서워? 재밌어? 수친(수영친구) 생겼어?라고 물어보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테니스 배우는 친구에게 물어보는 게 늘 안 더워? 팔꿈치 안 아파? 치마가 편해, 바지가 편해?였나 보다. 아는 게 있어야 물어라도 보지. 난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어쨌거나 각 반의 1, 2번은 당일 수업의 스피드를 결정한다. 1, 2번이 빠르게 돌면 따라오는 사람들도 헉헉 거리면서도 빨리 따라붙게 된다. 반대로 한 바퀴 돌고 오래 쉬면 다들 줄지어 같이 쉬게 된다.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바로 우리 1, 2번의 숨은 임무랄까. 두 번째 수업부터 자유형, 배영을 배우기까지 늘 앞에 서던 내가 잠시 주춤했던 건 평영을 배우면서다. 먼저 배운 영법보다 영 몸에 익지 않는 데다 가끔 무릎이며 골반이 아프기까지 하니 두배로 풀이 죽었다. 그러던 차에 강사님이 스치듯 하신 말씀이 한참 동안 마음에 남았다.
-계속 앞에 서느라 부담스러운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잘해왔으니까 쭉 잘해야 할 것 같은 거지. 그것만으로도 부담스럽잖아요. 천천히 해요. 잘하고 있는데 갑자기 좀 쫄았어! 내가 혼낸 것도 아니고 아무도 빨리 가라고 안 하는데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아요. 조금 가볍게 출발해봐요.
평영이 편해지기 시작한 건 딱 그때부터다. 분명 하루아침에 발차기가 완벽해진 것도 아닐 텐데 마법처럼 한 바퀴가 수월해졌다. 한 바퀴가 수월해지니 두 번째 바퀴도 자신감이 생겼다. 평영과는 그렇게 띄엄띄엄 낯을 가리다 친해졌다. 배우고 연습하는 시간도 들일만큼 들여서겠지만 마음이 편해지니 몸이 가볍게 떴다. 그동안은 정확한 발차기를 하느라 머릿속으로 순서를 생각하기 바빴고, 발이 익숙해지니 팔동작을 신경 쓰느라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갔다. 몸에 힘을 조금 빼는 것만으로 물살을 가르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고 보니 첫 수업부터 누차 듣던 말이 힘 빼고! 힘주지 말고! 천천히! 였다.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결국 같은 뜻이다. 힘을 빼라는 것. 그때는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았고, 들었다 해도 되지 않았다. 당장 물에 뜨는지도 모르고 몸을 담갔는데 긴장이 되는 건 당연지사. 겨우 물이 익숙해졌는데 쉴 새 없이 물에서 움직이며 숨을 쉬려다 보니 또다시 긴장모드. 아닌 척 해도 불안하고 그러니 몸은 굳고, 바짝 힘이 들어가니 동작은 부자연스러워진다. 다시 심기일전해보지만 경직된 몸을 이완시키는 건 말이 쉽지 절대 만만하지 않다. 그러다 우연히 힘이 좀 빠진 채 한 바퀴 돌고 오면 그제야 깨닫늗다. 방금 너무 잘됐어! 내가 봐도 자연스러웠어! 비로소 그때,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힘을 빼야 속도가 나는 그 아이러니를 말이다.
지금 우리 반은 암묵적으로 영법별 순번이 정해져 있다. 우리끼리는 자연스럽게 그 순번을 지킨다. 늘 앞에 서던 나도 지난달까지는 평영 할 때 두어 명을 기어이 내 앞으로 보냈다. 괜히 느린 나 때문에 내 발에 차이는 게 느껴져서다. 수영을 몇 달쯤 하다 보니 영 느리게 가는 것보다 더 불편한 게 가다 서다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마다 낼 수 있는 속도가 다르고, 편한 속도가 다르기 마련이지만 자기 속도대로 가지 못할 때 흐름이 끊기고 금방 힘들어진다. 그런 날은 운동을 한 개운한 보람도 없다. 어쨌거나 오늘도 굳이 순번을 바꾸려 하거나 거스르지 않은 채 우리 반의 헤엄이 시작된다. 자유형은 고정적으로 상어 같은 A 언니, 배영이 시작되면 S 언니는 쓱 조용히 뒤로 간다. 평영이 시작되면 또 한 번 순서가 바뀐다. 이렇게 나름의 순서를 지켜가며 즐겁게 수영하는 우리 반에도 딱 한 가지 열외사항이 있다. 이름하야 맨 뒤로 갈 수 있는 ‘오늘의 열외’다. 제일 뒤로 가도 이해해 주고 왜 뒤로 가는 거냐며 굳이 붙잡아 이유를 묻지 않는 아묻따 열외.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숙취가 있는 회원님이다. 전날 달린 자여 오늘은 뒤로 가시게,라는 인도적 차원의 조치다. 과음한 다음날 수영장에 오면 파란 물만 봐도 울렁거리고 숨을 참아가며 수영을 할라치면 정말 토할 것 같단다. 술을 못하는 나로서는 모르는 차원의 느낌이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는 걸 보면 그렇긴 한 모양이다. 누가 봐도 전날 과음한 듯한 언니 한 명이 두 손으로 입을 부여잡고 맨 뒤로 총총 간 날 우리는 한참을 웃었고 술기운이 느껴지는 언니의 고장 난 발차기에 잠시 걱정도 하다가 그래도 기어이 수업을 다 해내는 모습에 감명까지 받았다. 이후로 우리는 술 먹은 사람, 숙취가 느껴지는 사람은 뒤로 보내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업 전에 과음한 사람이 자진신고를 한다든가, 멋쩍은 웃음과 단호한 발걸음으로 슬쩍 뒤로 가는 회원님이 있는 것이다.
매번 전속력으로 수영하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영법을 같은 힘으로, 같은 수준으로 할 필요도 없다. 실은 모든 영법을 다 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호텔 수영이 목표인 사람도 있고, 자유형만 배우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배우다 보면 당연히 조금 더 잘하는 영법이 있고 유독 힘든 부분이 있다. 타고난 신체 조건 때문에 잘하기 힘든 영법이 있을 수도 있고, 아프거나 불편한 특정 부위 때문에 배워도 안 되는 영법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자유형 세 바퀴는 안 쉬고 하겠어도 접영은 왕복 한 바퀴도 제대로 못하는가 하면 접영 두 바퀴가 낫지 자유형은 연달아 못하겠다는 회원님도 있다. 그러니 늘 전속력으로, 정확한 자세로, 모든 영법을 하려고 들지 않아도 된다. 전속력을 다하다가도 한 번은 천천히 가도 된다. 잠깐 천천히 가더라도 나는 여전히 수영중인 거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힘을 빼야 속도가 난다는 것. 그 아이러니 속에서 유레카를 외치는 그 날 비로소 알게 된다. 수영이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일이 힘을 빼면 더 수월할 수 있었다는 것. 필요이상으로 힘주고, 괜히 긴장하고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느라 내가 낼 수 있는 속도도 채 내지 못하고 자꾸만 느려지고 미끄러지는 건 아니었을까. 그런 다음에도 그게 다 내 탓이고, 때론 너 탓이고 이따금 세상 탓이라고 핏대를 세우며 또 힘을 주느라 그 굴레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니었을지. 그러니 일단 힘을 빼보자. 놀랍게도 속도가 나는 순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