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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씨 Oct 25. 2024

여름이 무르익듯이

드디어 선배반이 되다.

매일 보는 가족끼리는 우리가 닮았다는 건 잘 모르겠듯이, 자주보는 친구끼리도 살 빠진 건 눈치 못채듯이 (그러니 친구야 속상해하지마. 우리가 친한거지 안빠진 게아닐거야) 매일같이 함께 수영하는 우리 반끼리도, 그보다 자주 만나는 수친끼리도 서로의 수영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분명 안되던 것이 되는 경험이 몇 차례 지나갔지만 첫 자유형 성공만큼 짜릿하고 진한 기억이 또 있을까. 처음으로 안쉬고 25m 레인을 자유형으로 헤엄쳤을 때 고개를 들어 끝까지 왔음을 알아차리자마자 얼떨떨하면서도 벅차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기분. 비로소 수영을 했다는 느낌. 가뿐히 왕복 50m를 수영한 날도 얼결이었다. 이번엔 해보겠어, 오늘은 해내고야 말겠어. 라는 사전 다짐같은 건 없었다. 다짐해서 될 게 따로 있지 이건 그 분야가 아니라고 하루 하루 물 속에 나를 던질 뿐이었다. 사람마다 배우는 속도와 해내는 시간이 달랐기에 누군가는 배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는 한계절이 지날때 쯤이었다. 그게 무엇이고 어느 때이던간에 모든 성공의 순간, 우린 서로를 위해 엄지를 들어올리고 박수를 보냈다. 먼저 도착한 레인 끝에서 가쁜 숨을 고르다 누군가의 첫 성공을 목도하기도 했고, 물 밖에 나오자마자 붙잡힌채 보지 못한 그 순간을 전해듣기도 했다. 해낸 시기는 모두 달랐으나 해낸 순간의 표정은 모두 비슷했다. 나와 우리의 크고 작은 성취의 순간들이 물결이 되어 물방울로 흩어져 수영장 파란물에 녹아들었다.


그 사이 계절은 시간을 달려 하루가 다르게 더워졌다. 엊그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내 수영은 비슷한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땀 흘리며 수영장에 걸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을 쏟으며 도착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분명 수영은 시작도 안했는데, 샤워도 하기 전인데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다. 여러모로 수영은 친수성 운동이라고 농담도 하고 유난히 더운 올해 여름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덥다고 수업에 빠진 회원님은 한 분도 없었다. 대부분 수영장들이 지하에 위치한 반면 우리 동네 수영장은 1층에 위치한 데다 한쪽 벽면 길게 통창이 나 있어 사계절은 물론이요, 하루는 아침 햇살이 드리우고 어떤 날은 거센 장맛비가 창을 두드리고 또 다른 날은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힌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저 창 너머로 하얀 눈이 내리겠지. 그 날이 벌써 너무 기대된다. 그러고보니 배영을 배우던 지난 4월 하루는 천장에도 창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항상 수영장 바닥을 향해 머리를 박고 헤엄치느라 몰랐는데 물안경을 끼고 배영하던 날 갑자기 눈부셔 멈춰섰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수영장에선 말 그대로 하늘 한 번 볼 여유가 가능했다. 동시에 오늘은 수업 내내 눈이 부시구나, 수영장 물에 햇살이 닿으면 노란 게 아니라 하얘지는구나, 까지 느낄 다른 여유도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통창을 자랑하는 지하 아니고 지상 1층의 꽤나 큰 규모의 수영장이라 쿰쿰한 곰팡이 냄새도 없거니와 아무리 샤워장이 박터진다 해도 우동집처럼 회전율이 좋아 어지간하면 빈자리가 난다. (전부 자랑 맞다)


통창 너머 잡초가 눈에 띄게 키가 크고 푸르렀던 7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유독 잽싸게 수영복을 갈아입었고 수영장에 들어서자 나만큼이나 빠른 언니들이 보였다. 매일같이 봐도 만나면 반갑다고 쌍수를 흔드는 우리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웅성거린다. 이유인 즉슨 강사님이 오늘부터 3번, 4번 레인에 들어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자, 그러니까 세번째 레인을 쓴다는 기쁨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떠들어보겠다. 수영을 배운지 어느 덧 5개월, 여전히 수린이지만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네 가지를 고루 배우기는 했고 (네 가지 다 잘한다고는 안함) 자 이거 뭐게, 하고 헤엄치기 시작하면 누군가 내 영법을 맞출 수 있는 수준이 되긴 했다.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생각보다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음을 발견하며 마침내 수영으로 운동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랬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반은 지금까지 1번, 2번 레인을 써왔다. 이것이 또 무슨 의미냐하면 아직은 우리가 가장 막내반이라는 소리다. 우리 수영장은 1m, 1.2m 그리고 2m 레인으로 구분되어 있고 당연히 상급반으로 갈수록 깊은 물에서 수영한다. 1,2번 레인은 1m, 3번부터 7번까지는 1.2m 이후로는 모두 2m다. 접영을 배웠어도 그걸 곧잘 하는데도 월수금 9시반의 모든 수업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신참이다. 우리 수업이 있는 이 시간에 새로 반이 개설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하다. 다시 말해 어떻게 보나 우리반이 빼박 초보반이란 소리고 동시에 굉장히 운이 좋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야 퇴사를 결정하자마자 무작정! 그것도 이미 접수기간이 시작되고 나서야 ‘3월 기초반’에 등록했는데 그 후로 5개월간 기초반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수영을 하고 싶어도 수업이 없어 못 배우는 일이 생길수 밖에.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등록한 3월 기초반 역시 정말 오랜만에 생긴 기초반이었단다. 몇 몇 회원님들은 거의 반년을 기다려 시작하셨다고. 그러니 다시 말해 내가 퇴사는 했어도 망설이다 4월에 수영을 해보자 했다면 애초에 배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심리적인 것부터 벌거숭이 수영복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운동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도 이미 자유형을 배워버린 초급반에 들어가진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차일피일 미루다 흐지부지 되었을테다. 역시 수영은 다니기도 어렵네, 지금은 때가 아닌거야, 언젠가 배워야지, 라고 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다섯달을 더 기다려 7월에나 배우기 시작했을테니. 어쨌거나 3번, 4번 레인으로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우리반에 잔잔한 흥분이 일었다. 사실 레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물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니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나와 우리의 기분이 달라졌다는 게 중요하다. 암 중요하고 말고. 그저 우리가 쓰던 레인에 기초반이 들어온다는 것 만으로 들뜬다. 이미 우리뿐만 아니라 수영장에 있는 모두가 이 변화를 알아차렸다. 탈의실이고 샤워장이고 눈에 띄게 쭈뼛대는 분들이 보인다. 수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 무리의 검은 수영복. 더이상 모를 수가 없다. 기초반이다. 샤워장에서보다 한껏 더 말린 어깨로 물에 들어가지도 밖에 서 있지도 못하는 저 자세, 경험자로서 너무 공감한다. 불과 얼마전 내 모습이다. 물에 들어가서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두리번 두리번 괜히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물만 만지작 거리는 저 모습, 역시 과거 내 모습이다. 여느 때처럼 준비운동을 마치고 박수를 치면 수업이 시작된다. 오늘은 더 힘껏 두 손을 부딪혀본다. 첫 수업에 온 그들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몇 달 전의 나를 떠올리며 떨리고 설레고 긴장되는 그 마음을 향해 힘껏 큰 박수를 쳐본다.


접영 연습에 한창인 우리 반 옆으로 나란히 서서 음파 음파를 배우는 기초반이 보인다. 괜히 우쭐하기도 하고 나도 처음엔 저랬겠지 싶어 괜히 아련한 눈으로, 정말이지 물에 젖은 촉촉한 눈으로 자꾸만 그들을 바라본다. 언니들은 우스갯소리로 누구야 얼른 평영 멋지게 한번 보여줘라, 우리 다 같이 자유형으로 한바퀴 다녀오자 하신다. 아이 참 부끄럽게 왜 그래요 하면서도 성화에 못이겨 평영도 자유형도 다 했다. 정말이지 열심히 했다. 평상시보다 자세에 신경도 써가며 숨도 조금 더 참아가며 돌고 또 돌았다. 그 와중에도 오른쪽의 시선들을 다 느껴가면서 말이다. 나 역시 3월 내내 수업 들으랴, 숨 쉬랴, 물에 적응하랴 바쁘면서도 자꾸만 옆반을 곁눈질했다. 우와 멋있다, 얼마나 하면 저렇게 수영할 수 있을까, 저게 접영인건가, 와 오자마자 또 간다. 놀랠 것, 감탄할 것 천지였다. 아니 그런데 강사님도 자꾸만 우리를 재촉하신다. 옆에 후배들도 생겼는데 이렇게 할겁니까! 한바퀴 더! 갈 때 평영 올 때 자유형 안 쉬고 두번 더 돌게요 출발! 어허, 선배들이 이렇게 해서야 되나, 팔 신경쓰고 다시 한바퀴 가볼게요! 강사님, 저희가 수업 시작도 전에 진을 뺐거든요. 그 선배미인지 뭔지 뽐내느라 이미 250m를 돌았거든요 그것도 전속력으로 말이에요. 사실 선배미란 이런거잖아요. 폼 잡다 제 풀에 지치는거요. 이후로 한참동안 정작 그들은 관심도 상관도 없는 우리만의 선배 리그를 소화하느라 우린 빨랐고 바빴고 숨이 찼다. 갈수록 추임새가 얼큰해진다. 헉헉. 선배노릇하다 쥐나겠네 소리가 나올만큼. 유독 말없는 회원님 한 분도 입을 여신다. 그런데 저들이 우릴 보긴 보는겨?


하루는 샤워를 하고 나와 거울 속 나를 보고 흠칫 놀란다. 그간 열심히 운동한 보람인지 몰라보게 살이 빠져서 맨몸도 꽤나 맵시가 있어서, 라는 건 보통 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이고 거울 속 여자가 제법 까매서다. 봄 햇살부터 여름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뻔질나게 수영장에 드나든 결과 눈에 띄게 시꺼매진 나머지 까딱하면 살이 빠진 것 같아 보이기까지하다. 타는게 싫어서 얼굴이고 팔다리고 선크림이라면 사계절 꼬박 잘 바르는 데 샤워를 두번씩이나 해야하는 수영을 하다보니 씻고 바르는게 너무도 귀찮아서 대충 모자나 선글라스를 썼더니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영 싫지 않다. 회사 다닐 땐 점심시간에 꼴랑 10분 걸을까말까였는데, 그마저도 햇빛을 쬘까말까였는데 올해는 원 없이 태양 아래를 누빈다. 회사가 없어진 자리에 새로운 취미 사회가 자리잡았고 동료가 사라진 자리는 수친들이 그자릴 채웠다. 어서 아침이 오길 기대하며 집을 나서고 퇴근하고 멍하니 티비나 보며 풋 하고 마른 웃음을 짓던 내가 하루에도 몇 번 자지러지게 웃는다. 여름이 무르익듯이 모든 것이 발갛고 뜨거워졌다.


올봄 시작은 분명 소소했다. 그저 나는 적당히 뜨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미 너무도 많은 것들이 무성해졌다, 저 나무처럼. 무르익었다, 이 여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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