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지나 여름에 들어서자 수업 진도가 빨라졌다. 가차 없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어서오세요 기초반은 적응과 숨쉬기 그리고 자유형 돌입. 어떠신가요 초급반은 자유형 완성과 배영 시작. 또 오셨네요 중급반은 평영. 그다음 상급반은 접영. 학교도 1년은 지나야 학년과 반이 바뀌는데 한 달마다 초고속 진급이다. 그 사이에 접영에 다다랐다. 초고속 진급의 장점은 회원카드를 찍을 때마다 매달 바뀌는 ‘초급-중급-상급’이라는 글자가 운동 의욕을 고취시킨다는 것이고 왠지 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객관적인 사실과 상관없이 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덤이다. 태권도의 미학은 우아한 손끝과 힘찬 발차기뿐만 아니라 하얀 도복 허리춤에 걸린 띠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동시에 그 띠가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서 또 동시에 한참을 배워도 소속이 불분명한 요가 수련자로서 반과 급수가 주는 알 수 없는 소속감과 우월감은 수린이를 신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처음 몇 달간은 그렇다. 지나고 보니 정말 딱 몇 달만 그렇다.
반대로 단점은 음,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 일단 방금 들었던 '잘하고 늘고 어쩌고의 기분과 느낌'이 정말 기분과 느낌뿐이라는 것부터 말해야겠다. 자유형으로 채 한 바퀴(50m)도 돌지 못하는데 배영을 배우질 않나, 겨우 배운 두 개가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평영을 시작하질 않나 겨우 개구리 비슷해졌는데 바로 접영이 시작된다. 매달 영법이 바뀌는 사이마다 각 영법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어떤 게 유독 힘든지 따위는 묻기도 전에 묻히고 답하기도 전에 잊힌다. 하루는 이게 맞나 싶어 다른 지역dml 도시공사 소속 수영장 홈페이지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소름 끼치게 똑같다. 수업 스케줄만 다를 뿐 반 이름마저 정확히 같다. 이쯤 되면 수영 4개월 차에 나 4가지 영법 다 배웠어,라고 해도 정 거짓말은 아닌 것이다. 초고속 진급의 다음 단점은 무슨 반이야?라고 했을 때 상급반이야.라고 하면 우와 벌써? 수영 엄청 잘하겠다.라는 소릴 자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양심 및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칭찬을 듣고도 찜찜한 게 여간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만 해도 찝찝했는데 벌써 접영배워? 엄청 늘었겠네. 선수 다 됐네~라는 말까지 나오면 조금 숨고 싶어 진다. 그들에게 대놓고 그게 아니라요, 한 달마다 반이 바뀌어요. 저는 지금 자유형 뺑뺑이(쉬지 않고 몇 번이고 레인을 도는 것)는 벅차고 배영은 자꾸 물먹고 평영은 되다 안되다 해요.라고 자진납세 하기엔 그들의 눈이 너무도 밝게 빛난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미 내가 수영을 꽤 잘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굳이 그걸 꺾을 필요는 또 있을까 아니 뭐 어쨌든 할 줄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덜 당당하게 이제 누가 봐도 수영 같아요. 막 자유형으로 왔다 갔다 해요 (틀린말 아님) 자유형 하다 배영도 해요 (틀린말 아님2) 자유형 하다 지치면 평영도 좀 하고 그래요 (틀린말 아님 3)라고 조금 덜 떳떳하게 말하곤 한다. 자세가 얼마나 정확하고 예쁜지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지 뭐. (그들이 그것까지 궁금한 건 아닐거야) 그리고 꼭 끝에 이번달부터 접영 배우고 있어요. (틀린말 아님 4)라고 덧붙인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수영을 얼마나 잘 알던, 해본 적이 있던 없던 접영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다들 한번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반응들은 오 접영! 선수들이 하는 거! 제일 어렵다던데! 우와! 중에 하나다.
그렇다. 우리도 그랬다. 우리가 접영을 배우다니 감개무량이다. 나 정말 적당히 뜨고 싶었을 뿐인데. 평영의 후폭풍이 채 가시기 전에 우리 반에도 접영이 날아들었다. 접영을 접영이라 부르는 것은 물을 밀어내는 스트로크의 모양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과연 그것만으로 접영이라 부르는 것일까. 접영이 불러오는 나비효과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접영이 나비모양인데 그것이 정말 나비효과를… 나비효과란 본디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 작은 차이, 사소한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나 파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접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반에게 또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 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반년동안 그 흔한 기쎈할머니 없이, 회원님들이 드나드는 동안 텃세 한번 없는 평균연령은 낮고 평균데시벨은 높은 화목하고 즐거운 반이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강사님 왈 제일 좋은데 힘든 반이 우리 반이란다. 모두가 왜냐고 따지지 못했다. 말 많고 까르르까르르 웃고 떠들고 수영장 물도 맛보고 즐기고 (이하 생략) 다들 눈빛을 주고받자마자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또다시 까르르까르르. 그 모습을 보고 강사님은 어이없어하며 4시 반 어린이반보다 말을 안 듣지만 늘 밝고 즐거운 최애반이라 하셨다. 실제로 오후에 자유수영을 온 날 아이들반을 슬쩍 봤는데 정말 말을 잘 듣더라. 다들 곧은 자세로 가만히 서서 강사님의 말을 경청한다. (낯설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 있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고 단호하고 카리스마까지 느껴지던 낯선 우리 강사님의 모습. (낯설다2) 우리 반은 강사님이 말하는 동안 아무 데서나 질문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우리끼리 떠들어 재끼다 못해 가만히 서 있질 못해 미끄러지기도 하느라 강사님은 쩔쩔매시다 결국 웃어버리신다. 오후의 낯선 광경을 나만 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린 다음 수업 때 좀 겸연쩍고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가지런하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결국 수업이 끝나고 사실 오후 수업을 봤다고 자백했다. 어쨌거나 밝고 시끄러운 우리 반에 어울리지 않는 침묵과 한숨이 다시 도사린 건 접영이 시작되고 나서다. 좀처럼 되지 않고 늘지도 않던 평영을 뒤로하고 새롭고 예쁘고 우아하기까지 한 웨이브를 배울 때만 해도 여전히 즐거웠다. 어릴 적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 사이를 가르는 인어언니가 떠오르는 접영 웨이브는 힘들이지 않고 물살을 가르는 기분이 들어 개구리헤엄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마음에 든 건 접영과 친해지기 위한 웨이브 동작일 뿐이었고 엄연히 말해 접영은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영법과 다르게 접영은 입수킥과 출수킥으로 발차기를 나누어 배운다. 그만큼 특유의 리듬감이 중요하고 힘도 훨씬 많이 든다. 입수킥과 함께 상체에서 시작된 유연한 웨이브의 힘을 받아 출수킥을 이어가야 한다. 말 그대로 출수킥이니까 나비처럼 두 팔 벌려 몸도 나와야 하고 숨도 쉬어야 하고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입수킥만 차면 조난자가 되는 것이다. 살려달라는 것 마냥 두 팔이 나오다 말고 꼬르륵 잠겨버린다. 자유형을 할 때만 해도 가를만 했던 수영장 물살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나 싶다. 그 물살을 유독 얇은 팔로 퍼 올리는데 팔뚝이 단단해질 만큼 힘이 들어가도 제대로 나와보지도 못하고 앞으로 처박히기만 한다. 수업을 거듭할수록 부상자가 속출했다. 대개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오려다 허리를 과하게 드는 바람에 허리가 아프고 두 발을 모아 차는 킥이 처음이라 너무 힘을 주느라 무릎이나 발목이 불편해진다. 결국 엄한 데다 힘들을 주느라 탈이 났다. 정말 우리의 몸짓이 S.O.S처럼 보여서인지, 눈에 띄게 늘어버린 푸념 때문인지 강사님은 수업이 끝날 때마다 접영이 원래 어려워요, 그래서 두 달 잡고 배우는 거예요라고 달래기 바빴다.
이미 마의 평영을 넘지 못해 작별한 회원님이 여럿 계시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회원님 중에 정말로 사상자가 생겨버렸고 한 달이 지나가자 아예 반을 옮기신 분도 여럿 생겨버렸다. 평영이 불러온 첫 좌절의 어두컴컴한 기운이 또 한 번 우리 반에 감돌았다. 첫 좌절, 첫 이별을 몰고 온 마의 평영이라지만 나는 그런대로 그 시기를 지나왔다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난 좌절한 게 아니야, 지금 평영이 잘 되지 않는다고 나에게 수영 권태기가 찾아올 리가 없어.라고 은연중에 스스로 조금씩 세뇌하다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접영을 배우는 한 달 동안 물을 뚝뚝 흘리며 수모를 홱 벗어 젖히면서 벌게진 얼굴은 비단 열심히 하고 나와서만은 아니었다. 전날 밤 유튜브를 한참을 봤는데 본 대로 잘 되지 않아 씩씩 거린 탓도 있다. 본 것처럼 생각처럼 맘처럼 따라주지 않는 자세 때문에 수영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어느 날은 꿈속의 내가 너무 잘해서 물 안에 들어와 풀이 죽고 다른 날은 꿈속에서도 나부끼다 처박히는 내가 생생히 기억나 기가 죽었다. 분명 몇 달 전 수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애정이 싹트기만 하면 좋겠다고, 일단 싹만 보이면 물을 주고 볕을 쪼이는 건 내 몫이고 그건 잘할 자신이 있네 어쩌네 한 내 모습도 여전히 생생하다. 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분명 이런저런 일들을 이렇게 저렇게 겪어 보고도 또 한 치 앞을 몰랐나 봐요. 그때만 해도 제 바람은 소박했다고요. 그렇게 애정이 애증이 되어버리는 동안 시간이 약이고 연습이 답이라고 접영은 점점 나비의 모습이 되어간다. 나비처럼 우아한 팔동작은 모르겠고 어쨌든 출수킥과 함께 숨을 쉬고 다시 물로 들어간다. 양발을 벌리고 킥을 찬다거나 박자를 맞추지 못해 자빠지는 일이 줄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꽤 접영 같은 걸 하고 나온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강사님이 쓱 다가와 근래 중에 제일 좋아요라고 엄지를 보여주신다. 그 엄지에 다시 발가락이 불어 터지게 연습해 보는 것이다. 역시 내빼지만 않으면 완전히 나자빠지는 건 아니구나,라는 마음이 드는 초여름이었다.
얼마 전 재밌게 읽은 <시골 여자 축구>에 이런 문장이 있다.
“축구를 미워하게 될까 봐 무서웠는데 그건 아니었다. 막상 뛰어보니 그런저런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여전히 힘들고, 또 재미있었다. 다행히, 여전히 축구가 좋다. 다만 그저 재밌기만 했던 축구에 보다 복잡한 감정 이 뒤엉키게 되었을 뿐. 좀 더 복잡하게, 보다 진지하게, 한풀 꺾인 채로 좋아하게 된 것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꺾여버린 마음’이라고. 수영을 시작한 지 어느새 6개월, 순수하게 수영 한 날만 대충 꼽아도 벌써 꼬박 100일이 지났다. 잘 된 날도 잘 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칭찬을 받은 날도 자세를 지적받은 날도 있었다. 생각보다 좋으니 좋기만 할 줄 알았던 멍청하고 순수한 마음도 진심이었고 좋아죽겠는 걸 원 없이 하다 위기를 느끼니 잠깐 도망가고 싶어진 것도 진심이었다. 투정도 부리고 짜증을 내다가 어떤 날은 눈물이 날 것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수업을 빠지지 않았고 농담이라도 때려치우겠다 한 적도 없었다. 조금 찌그러진 모양으로, 잠깐 상처받은 마음으로, 되는 건 돼서 좋고 안 되는 건 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나도 모르게 수영에 이토록 진심이 되어버렸다. 그런 채로 계속 그리고 여전히 진심인 것뿐이다.
일을 하는 나도 그랬다. 수영장 밖의 나도 그랬다. 사는 게 그랬다. 한번 넘어졌으니 다음은 잘 알아채겠지 해도 여지없이 또 다른 시련에 자빠지고 비슷한 일에 마음을 다쳤다. 고꾸라졌으니 일어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일어나는 다리에 힘 한번 못 주는 날도 있었다. 일어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구겨진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일에 부딪히고 사람에 부대끼는 동안 전화위복은커녕 복은 온데간데없고 화만 가득했다. 그럴 때면 종교도 없는데 하늘과 허공에 대고 하소연해 본다. 신이시여, 어찌 저를 이렇게 과대평가하시나요. 저는 그저 미약한 중생입니다. 부디 저를 굽어 살피시고 어쩌고 저쩌고. (중략) 이건 아니라고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으르렁거리는 동안 그걸 버티는 나와 그런 나를 지지하는 주변의 힘이 복인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찢기고 뜯기고 아물고 그러는 동안 굳은 살도 생기고 단단하고 성숙해지는 나를 인정하고 바라봐주는데 인색했다. 역시나 사는 게 그렇다. 안 될 것 같은 일이 진짜 안되기도 하고 어쩌다 되기도 하는 동안 울다 웃는다. 넘어진 줄도 모르고 엎어져있기도 하고 그런 김에 누워도 본다. 시간이 답이라는 말은 그 시간을 견딘 사람만 공감하는 말이기에 모든 시간 모든 고통을 샅샅이 느끼지 말고 감당하지도 말고 잠깐 모르는 척도 하다 보면 결국 시간이 답이었네,라고 하는 나를 발견할 테니.
이렇게 잠겨 죽는 거 아니냐고 지레 겁먹던 내가 결국 얇디얇은 두 팔로 물살을 가르고 나와 다시 큰 숨을 들이마셨으니. 나비효과로만 끝날 것 같았던 여름 끝에 마침내 한 마리 나비가 되어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