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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씨 Oct 04. 2024

만년 맏이 K-장녀, 수영장에서 생애 첫 막내가 되다.

어머 제가 막내는 처음이라.

자유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수친이 생겼다. 운이 좋게도 두 회원님 모두 나보다 언니라 원 없이 언니! 언니! 부르는 중이다. 카카오톡 언니 이모티콘은 내 동생이 나한테 쓸 때만 봤지 내가 이렇게 많이 써보기는 처음이다. 불려만 봤지 부를 일은 없던 그 이름, 언니! 이 즈음부터 우리 반에도 서로를 부르는 대명사가 필요해졌다. 친해진 만큼 이런저런 얘길 나누면서도 누구 하나 쉽사리 나이는 묻지 않았다. 나이를 모르니 호칭이 애매하고 그러다 보니 눈이 마주쳐야 얘길 한다든가 물속에서 팔을 슬쩍 잡는 식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우리 반 90%가 여성이라 회원님 대신 언니라는 호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제일 편한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헷갈리는 두어 명을 제외한 모두를 나는 언니라고 불러왔다. 언니 안녕하세요. 언니 왜 지난주에 안 오셨어요. 언니 오늘은 좀 덥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 왕언니 격인 할머니 회원님께서 이른바 교통정리를 하셨다. 나 다음 언니가 누구여? 일동 당황. 아마 저일걸요 하고 한 회원분이 본인 나이를 오픈했는데 갑자기 다른 회원분이 다급하게 손을 드신다. 그럼 제가 더 언니예요. 그럼 저랑은 동갑이에요. 비슷한 수영복에 머리칼 한올 삐져나올 틈 없이 야무지게 수모까지 쓰고 맨얼굴로 물 안에 있으니 뭍에서보다 서로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얼마간 나이와 띠 얘기가 오갔다. 그날 이후로 정확한 숫자는 몰라도 순서는 대충 매겨진 듯하다. 이마저도 확신이 없는 이유는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언니들의 나이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언니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하루는 나에게 학생이랬나? 하시더니 또 다른 날엔 졸업은 했어요? 하셨다가 이제는 그냥 막내라고만 부른다. 모두들 처음엔 궁금하다가, 어느 날은 내가 틀렸나 싶다가도 결국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지 않을까. 어찌 되었건 우리 반엔 열댓 명의 언니들과 하나의 막내뿐이다. 누가 더 언니인지는 아직도 가끔 서로 헷갈려하시는데 내가 막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사실 나는 첫째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다. 키로 보나 힘으로 보나 내가 둘째 같지만 엄연히 내가 맏이다. 집에서도 맏딸인데 친인척이 모여도, 어릴 적 부모님 지인들의 아이를 모아놓고 봐도 내가 첫째였다. 첫째는 나서는 게 익숙하다. 어른들 눈치를 슥 보고 동생들을 적당히 이끌고 또 저지시킨다. 동생들이 하나 더 어지를 때 두 개를 주워 담는 게 첫째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고 뻗대면 나라도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크고 보니 다 그런건 아니었더라) 이상하게 크는 내내 어딜 가나 첫째였다. 그래서인지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가 주도적인 편이고 대학에서 팀과제를 할 때 선배들이 있는데도 내가 조장을 맡는 일이 허다했다. 이상하지도 않았고 늘 있는 일이니 별다른 불편함도 없었다. 그런 내가 루아침에 이렇게 대놓고 공식적으로 막내가 되었다. 오피셜한 막내 등극 이후 회원님들은 부쩍 나를 귀여워하신다. 내 수영복이 바뀌면 막내 네가 입으니까 예쁜 거다 하시고 언니들보다 한참 빠르게 한 바퀴 돌고 오면 막내 얘는 수영 천재라 하신다. 아, 이게 막내의 삶이었단 말인가! 어언 삼십 년을 도통 알 길이 없었던 막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여태 스스로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귀여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나를 귀여워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야 좀 귀여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외향적인 편이지만 수영장에서 언니들을 마주칠 때면 더 살갑게 굴고 강아지가 치대는 것마냥 부비적거리는 생경한 나를 발견한다. 나에게도 발현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나름의 귀여운 구석이 있었던 것인가! 이쯤 되면 귀여운 게 체질일만큼 막내 생활은 더없이 만족스럽다. 막내야~ 막둥아~ 귀요미~ 이쁜아~ 우리 집에서도 못 들어본 각종 호칭이 남사스럽다가도 싫지 않다. (쓰고 보니 어째 강아지 이름 같다. 소름돋게 나는 개띠란 말이지.) 만년 맏이 K-장녀가 막내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벚꽃이 거의 다 질 때 즈음, 수영장을 다니면서도 차츰 부러운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이곳에 대한 이런저런 적응이 어느 정도 되었다는 소리다. 부러움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야 그 틈을 비집고 생겨나는 것. 문제는 그 틈이 아무리 작아도 기어이 생겨난다는 것이고 또 요만한 틈에서 어떻게 이만큼 생겨났나 싶게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것이지만. 당장 한 시가 급하고 한 치 앞도 안 보일 때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순간마저도 사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빡빡한 샤워장에서 부대끼며 씻느라, 아가미도 없는데 물에서 호흡해 보겠다고 머리를 집어넣느라 고개 한 번 돌릴 새가 없었으니 말이다. 한 달 만에 겨우 생긴 나의 빈틈에 어떤 부러움들이 자라났느냐 하면 이미 수영선수 같은 널찍한 어깨와 긴 팔다리, 25m 레인을 거뜬하게 몇 번이고 왕복하는 사람, 오리발을 끼고 2m에서 수영하는 사람,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예쁜 수영복, 왠지 선수 같아 보이는 날렵한 수경, 내 것보다 튼튼해 보이는 수영가방. 챙기고 보면 꽤나 되는 수영짐을 차로 실어 나르는 사람. 말하고 보니 수린이 눈에는 전부다 별천지로 보일법 한 것 들인데 그럼에도 가장 부러운 걸 꼽으라면 ‘엄마와 함께 수영 배우는 사람’이다. 근사한 몸매와 대단한 체력은 나 역시 머지않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수영복, 수경, 가방쯤이야 당장이라도 사면 그만인 것이다. 어쨌거나 내 힘으로 되는 것, 나한테 달린 일들이다. 그런데 엄마와 함께 수영 배우는 일은 결이 완전히 다른 바람이다. 사실 나보다 먼저 수영을 배우고 싶어 한 건 엄마였다.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 나도 수영은 꼭 배워보고 싶어,라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둘은 언젠가 수영 꼭 해봐야지,라고 다짐했었다. 놀랍지도 않게 이 다짐은 다른 사람들처럼, 여느 꿈처럼 바쁜 일상에 치여 한 구석에 처박혀 오랫동안 잊혔다. 그리고 먼지가 풀신 나는 그 꿈을 먼저 풀어헤친 건 나였다. 그래서인지 나 수영 다니기로 했어,라고 했을 때 누구보다도 잘했다! 재밌겠다! 한 것도 엄마다. 첫 수영복이 도착한 날 저녁, 퇴근한 엄마 앞에 다 큰 딸이 대뜸 수영복에 수경, 수모까지 입고 나타났을 때도 한참 웃으시다 잘 골랐다! 예쁘다! 하셨다. 첫 수업부터 매일 밤 한참이나 미주알고주알 수영 얘길 풀어놓은 것도 엄마다. 그러다 문득 우리 반에 유독 닮은 두 분이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모녀 회원님이었다. 엄마 회원님은 오래전부터 수영이 배우고 싶었는데 혼자는 영 멋쩍고 수영장도 가깝지 않아 미루시다가 최근에 딸이 운전을 하면서 함께 다니신다고. 두 분은 샤워장에서 샴푸를 두고 투닥거리시기도 하고 수업시간에도 왜 빨리 안 가냐, 너도 내 나이 되봐라! 라며 은연중에 모녀 케미를 뽐내신다. 다른 회원님들은 그 모습이 흐뭇하고 또 한편 놀리다가 한쪽 편도 들었다가 웃기 바쁜데 나는 그 둘을 보고 있자니 자꾸 어딘가 시큰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한참 수영복을 자랑한 날도 나도 그 사이즈 하면 될까, 다른 디자인은 어떤 게 있나 궁금해하셔서 우린 한참이나 핸드폰을 들고 수영복을 구경했다. 첫 수업 썰을 재연까지 해가며 연신 풀어놓을 때도 본인이 다녀오신 것처럼 즐거워하셨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내 수영물품을 보며 잘 쓰고 다 나 줘라 하셨다. 그 이후로도 날이면 날마다 수친 생겼다, 자유형 성공했다, 새 수영복 샀다는 이야길 두서없이 쏟아놓는데 하루는 내 얘길 듣다 나지막이 나도 배우고 싶다, 하신다. 그날 엄마의 쓸쓸한 입매가 한참이나 맘에 걸린다. 나의 괜한 느낌일 수도 있지만 그날 이후 나는 수영 얘길 전처럼 늘어놓지 않는다. 그냥 오늘도 다녀왔어, 하고 만다. 지금껏 늘 바쁘게 일만 하셨지 본인을 위해 시간을 내어 무언가를 배운 적이 있으셨나 싶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고 나면 이제 눈가가 뜨끈해진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K-장녀다. 우리 반 모녀 회원님들은 두어 달 후 딸이 타지로 가야 해서 수영을 그만두었다. 운전을 못하시는 엄마 회원님은 멀기도 하고 혼자는 영 내키시지 않는다며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작별 인사를 하셨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에게 오래 잊히지 않을 추억이 됐으리라. 


그들을 떠올리면서, 혼자 수영을 다녀와 수영복을 정리하면서도 이따금 엄마를 생각한다. 수영장에선 누가 뭐래도 우리 반 막둥이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기어이 장녀 모드의 버튼이 눌리고야 만다. 아까 본 그 수영복이 엄마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든지, 엄마도 수영하면 좋을텐데라던지. 물 공포증이 있는 엄마가 수영장에 입성하는 그날을 누구보다 바라본다. 이미 첫 수영복은 내가, 첫 달 등록은 동생이 해주기로 했다. 박 터지는 샤워장의 뜨끈한 열기, 첫 주 내내 맛보고 삼키는 수영장 물,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았던 물속 호흡이 편해지는 순간의 성취감, 처음 자유형으로 25m를 수영한 날의 짜릿함, 수영을 끝내고 젖은 머리로 나올 때의 개운함도 하나하나 다 느껴보길 바란다. 그리고 수영이 끝나면 밥 한 끼 차 한잔에 두런두런 이야기 나눌 수친이 생기길. 엄마의 첫 수친은 내가 해줄 테니, 엄마의 작은 수확마다 손뼉 치며 공감해 줄 딸이 여기 있으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하나씩 꼭 해내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언젠가 함께 다짐했던 것처럼 엄마랑 커플 수영복을 입고 같이 수영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어느 날 이 모든 게 다 추억이 되는 날이 있길 바라며.


엄마, 몸만 오면 돼! 나 가방도 두 개, 수건도 두 개, 수경도 두 개야.

그리고 수영복은 엄마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 (방금까진 비밀이었다)

나랑 수영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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