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장들 4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문장을, 딸이 엮은 기록.

by 밍키

시골의 문장들___ 겨울의 문장들


“겨울의 문턱, 소설“


24 절기 중 20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이

코앞에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신묘년(辛卯年)도

끝자락을 향해 치닫고 있다.

머지않아 삶의 무거운 짐을 임진년(壬辰年)에게

떠넘기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부산하게 떠날

차비를 하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녘에 풍성했던 오곡들이

농부의 집으로 이사를 온 듯 가을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대문에는 잡신을 쫓는 엄나무가 다닥다닥 붙어

파수꾼처럼 걸려 있고,

추녀 기둥에는 종자로 쓰려는 옥수수 타래가

말벌집처럼 매달려

쥐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그 옆엔 조 이삭과 수수 이삭이 효수를 당한

병사처럼 늘어졌고,

나락은 창고에 돌담 쌓듯 차곡차곡,

콩과 옥수수 가마니는 그 옆에서

왕을 호위하는 신하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들깨와 참깨, 고추, 수수, 호박은 시렁에

보물처럼 얹혀 으스대고,

대마도에서 시집온 고구마는

동남아에서 온 아낙처럼

솜이불을 덮고도 추위에 오들오들 떤다.


장작은 헛간에 쌓여 서로를 껴안고

동장군을 막을 채비를 한다.


농기구는 동면하듯 시렁에 조용히 잠들었고,

양지쪽 늙은 살구나무는 명년 봄을 기다리며

눈이불을 고대한다.


살구나무 밑 장독대에는

항아리들이 삼대가 모인 듯

오순도순 앉아 햇살을 쬐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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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절기 중 스무 번째, 소설(小雪).

눈이 살짝 내리기 시작한다는 뜻이지만,

아버지에게 소설은 눈보다 먼저 마음이

두툼해지는 계절이었다.


가을의 수확을 잘 들여놓고,

겨울을 맞이하는 집안 구석구석의 풍경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오던 계절.


아버지는 그 계절을

‘삶의 짐을 넘기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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