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화면의 공포가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
예체능 전공자라면
중학교던
고등학교던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순수 예술을 할까?
디자인이나 대중 예술을 할까?
나는 솔직히
새하얀 캔버스를 무척 무서워 했다.
글을 쓰기 위한
하얀 화면도 어찌 보면 비슷하지만
그래도...
커서가 깜박이는 건 좀 덜 무섭다고 할까?
적어도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 시절에는
패션을 선택했다.
디자인을 하거나 기획을 해야 하는
새하얀 화면은 똑같지만
적어도 트렌드라는 일종의 내비게이션 같은 건 있었으니깐!
그래서
루초 폰타나도 좋아했다.
그는
내가 무서워 하던
하얀 캔버스를 찢었고
그 너머를 이야기하는 작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캔버스가 무섭지 않아 진 건 아니었다.
대리만족 정도였지...
그의 베인 듯
선명한 틈 뒤에는...
어차피 또 무언가를
한 화면 안에서 말해야 하는
회화가 가진 한계성이 주는 극명한 개성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디자인을 하다가 답답할 때도
디자인을 하지 않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종종
나는 왜 순수예술을 하지 않았던가에 대해
답이 없는 물음을 스스로 건네곤 했다.
그래서
그 틈 넘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강요하는 것처럼
하얀 캔버스보다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나라는 사람 따위는 통과하기 정말 어려운
좁은 틈처럼.
이런 내 관점을 뒤흔들어 준 건
새벽녘에 본 케이블 채널의 한 다큐멘터리였다.
미슐랭 쓰리 스타의 프랑스 셰프
미셸 트와그로(Michel Troisgros)가 나왔는데
그는
접시에 하얗고 네모난 치즈 한 장을 고객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칼로 쓱 긋자
그 틈으로 블랙 트러플로 된 그의 요리가 살짝 보였다.
뭐가 그렇게 심각했던 걸까?
그저 그처럼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건데...
회화의 한계성은 그 밖에서 수많은 창작물이 될 수도 있는데...
순수예술이 하고 싶다면
취미로 시작해 보면 될 일이었다.
빈 캔버스 따위가 뭐라고...
왜 그랬을까?
나도 확 칼로 그어나 볼 걸 그랬다.
루초 폰타나 처럼
제목 : Attesa
작가 : 루초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
소장처 : Art Basel
연도 : 1964-1965년
재료 : 워터페인트 & 캔버스
이제 뭔갈 꿈꾸기는
늦어버렸다고 혼자 겁을 냈는지도 모르겠다.
지켜야 할 만큼 이룬 것들이 있고
굳이
사람들의 심판대에 올라야 할 만큼
부족하지 않으니
도전이
창피하고 무서웠나 보다.
저 날을 개기로
난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제목 : Attesa
작가 : 루초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
소장처 : Art Basel
연도 : 1964-1965년
재료 : 워터페인트 & 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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