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수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온 설희는 불도 키지 않고 텅 빈 집안 현관에 서서 방자훈에게 전화를 했다.
‘뚜... 뚜... 뚜...’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아직 제주도 콘서트의 마무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무당촌네 어르신들을 죄다 모시고 갔으니 그 성격에 어른들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게 뻔했다.
‘젠장!’
쿨하고 사리밝기로 판산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설희지만, 오늘은 현수의 엽서 때문에 설희 답지 않게 초조했다.
설희만큼 현수를 아끼는 게 방자훈이고 그에게 민현수는 DNA만 다른 쌍둥이와 다름 없었다. 그러니 이소식을 설희 입장에서는 방자훈이 제일 먼저 알았어야 할 일이다.
미련한 민현수는 아마 자훈이가 서울에 오기 전까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사람 챙기는 오지랖이 하늘을 찌르는 방자훈을 알기에 설희와 현수는 자훈이가 집중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그게 도와주는거니깐.
‘기억’에 관한 사건을 설희는 묵과할 수 없었다.
설희는 거실에 털썩 앉아 자훈이에게 톡을 남겼다.
‘현수 일이야.
바로 전화 줘!’
설희는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옛생각에 빠져들었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날의 기억으로.
현수의 비밀에 대해서...
#2
사람마다 소중하게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머릿 속에 각색되고 재편집 된다.
오래된 좋은 기억은 더 좋은 모습, 더 행복한 이미지로 남는다.
나쁜 기억은 더 슬프고 암울하게 기억 되기도 하고 희석되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망각되기도 한다.
마치 모래성처럼.
그래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어떤 나쁜 기억은 그 감정이 트라우마가 되고 병이 된다.
결코 쉽사리 잊혀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기억이 이렇게 변하는 건, 거기에 담긴 감정 때문이다.
산 사람은 맛있게 먹던 돈까스 가게의 벽지가 무엇이었는지는 20년쯤 지나면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돈까스를 먹으며 느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은 기억한다.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사람은 과거에 대한 사실을 ‘좋았던 감정’으로 기억한다. 이런 좋은 감정들이 쌓이면?
사람을 지탱해주는 행복한 시간이란 방어막이 견고해진다.
좋은 감정이 많이 쌓인 이들은 아프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때의 기억이 방패가 되어 현실을 견디고 버티게 해준다.
사람들은 멘탈의 문제라고 하겠지만, 이런 감정과 기억의 힘 없이 현실을 오롯히 홀로 견디기란 무척 힘들 일이다.
물론 셀프 채찍질 같은 자기 개발을 통해서 강인한 멘탈을 가지게 된 이도 있다.
하지만 100명 중에 1명 정도만 가능할까? 말까? 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설계한 신은 좋은 감정들이 쌓여 현생을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길 빌며 ‘기억’이란 힘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기억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다.
현수의 비밀은 더 강렬하다.
현수는 이런 기억을,
그것도 타인의 기억을 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자신의 기억을 빌려 줄 수도 있다.
설희의 지금 반응은 괜한 것이 아니다.
#3
설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일기장이 2권이었던 아이였다.
학교 과제용 일기 1권.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다이어리’ 1권.
설희는 그 즈음 아이들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자물쇠가 달린 그런 다이어리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어린 설희에게,
장기 입원 중인 양가의 조부모와 그로 인한 가난은 유독 답답하게 다가왔었다.
엇나갈 만큼 철없는 아이도 아니니...
설희는 늘 모든 이야기를 다이어리에 털어놓곤 했다. 마치 ‘안네의 일기’처럼 말이다.
‘00년 00월 00일
안녕, 다이어리.
오늘은 외할머니 병원에 다녀왔어.
언제나처럼 산소 호흡기를 꼽고 있으셔.
엄마는 늘 말도 못하는 외할머니한테 말을 걸어.
난 그게 가끔 무서워.’
‘00년 00월 00일
Hello, 다이어리.
오늘은 아빠랑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다녀왔어.
내 나이에 이렇게 자주 병원에 가는 아이는 없을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병원은 에어콘이 있어서 엄청 시원하거든.
할아버지 병실에서 숙제할 때가 하루 중 가장 시원한 시간이야.’
‘00년 00월 00일
안녕~ 다이어리.
우리반 미영이가 어제 생일밥으로 티본 스테이크 먹었데.
티본 스테이크는 어떤 맛일까?
난 먹어본 적이 없어.
우리 집 외식은 늘 영화관 앞에 있는 돈까스 집이야...
병원비가 많이 들어서 어쩔 수 없어.
돈 때문에 엄마가 이번 주 내내 지방에서 굿을 하고 온데.
그럼 나는 티본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을까?’
설희는 다이어리에 적은 내용을 학교에 내는 일기장에 단 한번도 쓴 적이 없다.
그래서 아무도 설희가 티본 스테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걸 몰랐다.
오직 설희의 다이어리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설희의 다이어리는 현수가 죽을 뻔 한 것도 현수의 ‘기억’에 관한 것도 알고 있었다.
#4
‘00년 00월 00일
안녕, 다이어리.
결국 티본 스테이크는 먹지 못했어.
엄마가 굿한 돈으로 내 노트북이랑 헤드폰을 샀거든.
영어 듣기 평가 잘하라고... 엄마를 일주일씩 보지 못하게 하는 가난이 미워.
근데 다이어리, 티본 스테이크는 맛있을까?’
‘00년 00월 00일
다이어리... 오늘은 안녕이란 인사를 못할 것 같아.
이틀 전에 현수가 우리집에서 죽을 뻔했어.
그래서 어제는 나도 자훈이도 현수처럼 학교가지 않고 쉬었어.
현수는 괜찮을까?’
현수는 설희네에서 쓰러진 바로 다음 날 오후 느지막이 눈을 떴다.
현수 방에는 설희와 자훈이가 모여 있었다.
현수: (갈라지는 목소리로) 자훈아... 설희야...
설희, 자훈: 현수야!
아이들이 현수 침대로 모였다.
현수는 둘이 멀쩡한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현수: 학교는?
자훈: 어른들이 오늘은 쉬라고 하셨어.
설희: 응! 그래서 자훈이랑 너네집에 놀러 왔지.
자훈: 내가 도우미 이모 불러올게.
(방을 나가며) 너 깨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불러 달랬어.
현수: 할머니는?
설희: 너희 할머니는 아침부터 치성드리고 만월 도서관에 가셨데.
현수: 아...
설희: 현수야. 어제 일 기억나?
현수: 응... 엄청 춥고 정신없었어.
태풍에 휩쓸리듯 날아다녔던 것 같아.
앞에 하늘이 보였다가 땅이 보였다 계속 그랬어.
토할 것 같았어.
무당 아주머니들이랑 할머니가 기도하는 소리도 들렸어.
설희: 또 기억나는 건?
현수: 꽃분 이모의 따듯한 손이 생각나.
엄청 추웠는데 이모가 내 몸 어딘가를 잡은 후에는 좀 덜했거든.
도우미 이모:(문을 열고 들어오며) 현수야.
아효. 왠 몸살이라니.
어여 이거 먹자.
현수: 네.
현수는 도우미 이모가 가져온 죽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흰죽이었다.
설희: 하... 흰 죽이라니...
너 더 하얘지겠다?
현수: 그게 뭐야. 흐흐
자훈: 야~ 한 입만 줘봐.
나도 좀 하얘지자.
설희: (자훈이를 보며) 으이구!
이럴 때는 티본 스테이크라도 먹어야 기운이 날텐데!
현수: 티본 스테이크?
설희: 미영이 그러는데, 엄청 맛있고 엄청 비싸데!
먹고나면 배가 엄청 엄청 불러서 아침까지 배가 안 고프데.
현수: 아...
설희: 넌 먹어봤어?
현수: 응. 할머니 따라서 호텔 뷔페에서.
설희: 자훈이는?
자훈: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 식구들이랑 패밀리 레스토랑 가서 먹어봤지.
설희: ...
맛있어?
자훈: 어? 어...
현수: (말을 돌리며) 뭐 하고 있었어?
자훈: 어!
우리 숙제로 일기 쓰고 있었어!
현수는 자훈이와 설희가 펴 놓은 상을 보았다.
거기엔 학교에 제출해야 할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현수: 아! 맞다. 나도.
자훈: 니꺼도 꺼내놨지롱~
도우미 이모:(방 밖에서) 얘들아~ 나와서 간식 먹어~
현수도 몸 괜찮으면 바람 쐬게 나오렴.
자훈: 네!
설희: 너 나갈 수 있겠어?
현수: 아직은 좀...
자훈: 그럼 우리가 간식 받아올게.
그렇게 설희와 자훈이가 방을 나갔다.
기운이 없던 현수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작은 상을 손으로 잡고 기대 있다가 설희와 자훈이가 쓴 일기를 보게 되었다.
설희와 자훈이는 각각 일기장에 설희네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셋이 몸살이 났다고 썼다.
학교 제출용 일기는 진짜가 아니라며 셋은 서로 읽어보는 사이였다.
현수는 어제 사건으로 설희와 자훈이와 멀러질까바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아이들의 일기를 보고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아이들의 일기장을 들고 보다가 좀 전에 설희가 했던 ‘티본스테이크’ 이야기가 떠올랐다.
설희가 다이어리를 쓰며 ‘가난’을 슬퍼하는 모습이 현수 눈에 보이는 듯했다.
현수는 할 수만 있다면 설희에게 ‘내 기억을 빌려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뭔가 손끝이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곤 살짝 어지러웠다.
‘뚝...’
뭔가 물기 어린 게 상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현수 코에서 코피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털썩’
“꺄악!
이모! 현수가 코피 흘리며 쓰러졌어요!”
이틀 후에야 현수는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키가 큰 현수는 2교시 쉬는 시간이 끝나자, 앞자리에 앉은 자훈이와 설희에게로 향했다.
가까이 가니 설희가 티본스테이크 먹은 이야기를 미영이와 자훈이가 하는 게 들렸다.
뭔가 이상했다.
설희의 기억은 현수의 기억하는 호텔에서 먹었던 그 티본스테이크에 대한 것이었다.
#5
4학년 반 아이들이 2교시 쉬는 시간에 모여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자리가 앞쪽인 설희와 자훈이는 벌써 미영이랑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희: 미영아! 나 티본스테이크 먹었어.
미영: 진짜? 완전 맛있지.
언제 먹었어?
몸살이라더니~
설희: 어~ 호텔 뷔페 가서~
근데 한쪽은 조금 질기고 한쪽은 엄청 부드럽더라.
미영: 그래?
난 아빠가 잘라줘서 부드러운 쪽만 먹었나 봐.
자훈: 맞아~
나도 부드러웠는데.
설희: 아! 너네는 그럴 수도 있겠다.
난 할머니가 호텔 뷔페에서 따로 시켜줘서 먹었는데~
중간에 할머니가 부산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두분이 수다 떠느라.
내가 혼자 잘라서 먹었어.
미영: 우와!
너 칼질 잘하나 봐.
설희: 아냐. 겨우 했어.
할머니가 부산 친구를 15년 만에 만나셔서 어쩔 수 없었어.
미영: 우와... 15년.
그럼 어쩔 수 없지!
자훈: 와!
진짜 오랫동안 못 만나신 거다!
설희: 맞아!
미영: 근데...
그때도 우리 앞자리면 어떻게?
자훈: 주... 줄넘기가 성장판에 좋데.
설희: 진짜?
자훈: 어~ 태권도 사범님이 그랬어.
미영: 우리 있다가 3교시 쉬는 시간 때 같이 하러 가자!
자훈: 좋아!
현수는 이야기에 끼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학교가 끝나고 만월 도서관에 가야겠단 생각뿐이었다.
할머니던 꽃분 이모던 둘 중에 한명이 이 상황의 답을 알고 계실 것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현수는 미친 듯이 달려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설희와 자훈이는 그런 현수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보내줬다.
#6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설희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현수도 무사히 학교에 다시 나오고 미영이랑 자훈이랑 티본스테이크 이야기한 것도 너무 재밌었다.
현수가 아까 좀 빠르게 먼저 집으로 간 게 이상하긴 했지만.
뭐 나은지 얼마 안 돼서 집에 빨리 가서 쉬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니~
설희는 신이 나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오늘 이 기분을 다이어리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다이어리의 자물쇠를 열려고 하자 살짝 머리가 아팠다.
‘마지막 시간에 문제를 너무 열심히 풀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설희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려고 앞 뒷장을 뒤적이다가 설희는 너무 놀라서 다이어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설희가 자훈이에게 전화를 걸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설희: 방자훈!
자훈: 5분 전까지 같이 있어 놓고~
왜에?
설희: 너!
아까 미영이랑 나랑 티본스테이크 이야기한 거 기억나?
자훈: 어~ 기억나지.
설희: 그럼. 너.
우리 할머니 이야기한 것도 기억나?
자훈: 어! 기억나지.
줄넘기 얘기한 것도 기억나고~
너네 할머니가 호텔에서 15년 전 친구를 만나셨다며?
그래서 혼자 티본스테이크 칼질했다며~
설희: 자훈아.
나는 같이 호텔에 가줄 할머니가 없어.
친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 기억나? 너도 왔잖아.
우리 외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지 5년이 넘었어.
자훈: 마 맞아.
어? 근데 아까는... 이상하다?
설희: 자훈아.
우리 기억이 왜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