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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the record
Aug 22. 2024
#1
어색한 침묵이 관장실을 맴돌았다.
현수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홍란 할매: (말을 돌리며) 판덕아~
식당 방은 몇 시에 예약했어?
홍여사: (시계를 보며) 아이고 언니.
식당에 예약 시간이 다 됐다. 마!
홍란 할매: 꽃분아~
가서 마저 얘기하자.
방이라서 우리가 밖에 없을 거야. .
꽃분 이모: 어! 그래용?
현수야~ 할머니랑 먼저 앞장서렴.
현수: 네...
꽃분 이모.
현수 일행은 관장실을 나와 만월 도서관의 입구까지 내려왔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현수가 일부러 뛰어가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현수: 얼른 가요~
홍여사: 그래. 우리 수야~
홍란 할매: (귓속말로) 꽃분아.
현수가 우리가 다 같이 있으면 왠지 아까 하려던 말을 안할 것 같아.
꽃분 이모: (귓속말로) 할매도 그렇게 느꼈어요?
홍란 할매: (귓속말로) 내가 판덕이 몸이 찬 게 걱정이 돼서 담가둔 생강 식혜가 있거든?
그거 핑계를 대고 현수랑 같이 조금 늦게 오면서 이야기해 보렴.
꽃분 이모: (귓속말로) 네, 할매!
그렇게 둘이 귓속말하는 사이에 현수랑 홍여사가 벌써 만월 도서관과 멀어지고 있었다.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는 느낀 홍여사가 뒤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홍여사: 언니야~
와 이리 안 오노!
홍란 할매: 어~ 판덕아.
잠시 있어봐. 내가 너 주려고 생강 식혜를 담가놓고 깜빡했다.
내가 목욕탕 가서 가지고 와야지 싶다.
꽃분 이모: 할매, 제가 갔다 올께용~
무릎 아껴야지요.
홍란 할매: 그럴까?
판덕아, 현수 좀 이리 보내봐라.
꽃분이랑 해서 너네 집에 갔다 놓고 식당으로 오라 하는 게 좋겠어.
양이 많다~
홍여사: 현수야.
식당 어딘지 알제?
꽃분 이모랑 해서 집에 놓고 식당으로 와라.
현수: 네, 할머니.
갔다 올게요.
홍여사: 오이야~
현수가 꽃분 이모 쪽으로 오고, 홍란 할매와 홍여사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두 어른이 현수와 꽃분 이모의 목소리를 못 들을 만큼 멀어지자, 꽃분은 현수에게 만월 도서관의 정자로 가자고 말했다.
아까부터 몰래 현수를 지켜보고 있던 자훈이와 설희는 깜짝 놀랐다.
현수 일행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곳이 도서관 정자 옆에 있는 낮은 관상수였기 때문이다.
자훈이와 설희는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관상수 사이로 현수와 꽃분 이모를 훔쳐봤다.
#2
꽃분 이모: 현수야.
이모한테 할 말 없어?
현수: ...
꽃분 이모: 현수야,
할머니 걱정하실까바 그래?
현수: 이모.
(갑자기 크게 울며) 으허헝.
꽃분 이모: 어머! 현수야.
(현수를 안아주며) 괜찮아. 영혼이 빠져나갔다가 들어오면.
한동안 후유증이 있을 수 있어.
이거는 너네 할머니한테 이미 말해놨어.
현수: 그치만.
너무 이상해요. 그냥 너무 이상해요.
꽃분 이모: (현수 얼굴을 보며) 어떻게 이상한지 이모한테 알려줄래?
그래야 이모가 도울 수 있어.
현수: 그치만... 으허헝
꽃분 이모: 그만 울고~
계속 울면 현수 눈이 퉁퉁 부어서 할머니가 알아버릴 텐데?
현수: (양쪽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네, 이모.
현수는 꽃분 이모에게 티본스테이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설희의 기억 속에서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게 얼마나 슬픈지 보였다고 했다.
한 번도 티본스테이크를 먹어본 적 없는 설희에게 현수는 기억을 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자신의 기억이 설희에게 옮겨갔고, 자훈이마저 설희가 티본스테이크를 먹어본 걸로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꽃분 이모는 현수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으며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꽃분 이모: ... 현수야.
제일 처음 설희가 티본스테이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말이야.
너, 설희, 자훈이 이렇게 셋이 뭘 하고 있었어?
현수: 설희와 자훈이가 제 방에서 숙제로 일기를 쓰고 있었어요.
꽃분 이모: 혹시 현수야.
그 티본스테이크 먹었던 기억을 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들의 일기장을 만졌니?
현수: 음, 그때.
설희와 자훈이 일기장이 상 위에 있었는데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상이 작기도 하고 그날 기운이 없어서 상을 손으로 짚고 있었던 거 같아요.
일기장을 같이 짚고 있었던 거 같아요.
꽃분 이모: 그래~ 또 기억나는 거는 없니?
현수: 음, 설희에게 제 기억을 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손이 짜릿한 기분이 들었어요.
꽃분 이모: 흠.
설희가 기억하는 건 확실히 현수 니 기억이고?
현수: 네.
꽃분 이모: 그래그래~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현수가 왜 속상해하며 울었던 건지도 말해줄 수 있어?
현수: 저 때문에 설희가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아서요.
자훈이도요.
꽃분 이모: 우리 현수, 그게 걱정이구나.
현수: 나중에요.
미영이가 이걸 알게 돼서 설희랑 자훈이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요?
으흐헝.
나 때문에 설희랑 자훈이가 나쁜 짓을 한 게 됐어요.
꽃분 이모: 현수야!
자훈이랑 설희는 니가 기억을 빌려준 걸 아니?
현수: 아니요. 모르는 것 같아요.
꽃분 이모: 음~ 그럼.
우리 하얀 거짓말 한번 할까?
현수: 하얀 거짓말이요?
꽃분 이모: 기억을 보고, 기억을 빌려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라 염라대왕님한테 보고해야만 해.
아마 그럼 염라대왕님은 아이들의 기억을 봉인해야 할 거야.
이건 아이들에겐 좀 부담이 되는 일이라...
현수: (울먹이며) 그, 그건 안 돼요!
꽃분 이모: 그래서 이모가 하얀 거짓말을 하려고 해.
현수: 어떻게요?
꽃분 이모: 주말에 설희랑 자훈이랑 가족들까지 다 모여서 우리 티본스테이크를 해 먹자.
실제로 먹은 기억을 만들어 버리면,
설희도 자훈이도 더 이상 거짓말쟁이가 아닌 거잖아?
어때?
현수: 조, 좋아요!
꽃분 이모: 그럼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다?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
현수: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이요.
꽃분 이모: 이제 홍란 목욕탕 가서 생강 식혜나 가지러 갈까?
현수: 네!
#3
현수와 꽃분 이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설희와 자훈이는 입을 막고 있던 양손을 내려놓았다.
설희: 자훈아.
나는 하얀 거짓말에 찬성이야.
자훈: 나도.
우린 오늘 만월 도서관에 온 적이 없어.
설희: 응.
설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자훈이는 일어나질 못했다.
아까까지 심장이 간질간질했던 자훈이는 왠지 설희와 헤어지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자훈이 입을 막았던 설희 손에 뭔가 마법이라도 깃든 건 아닌가 싶었다. 설희 손을 한 번 더 만져보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하늘이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자훈이는 꾀를 내었다.
자훈: 설희야~
배고프지 않냐? 우리 아빠한테 용용각 시켜달라고 할까?
설희: 음. 좋아!
자훈: (설희 손을 잡고) 가자.
설희: 야, 손을 왜 잡아!
자훈: 배가 고파서 빨리 가려고~
자훈이는 설희가 손을 뿌리치치도 못하게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방 씨네 복덕방 문을 열고 외쳤다.
자훈: (숨을 몰아쉬며) 아빠!
나, 용용각 난자완스.
방 사장: 어이쿠야. 아들아!
문 부서지겠다.
설희: 헉, 헉.
아, 안녕하세요.
방 사장: 아니 설희야.
(애들을 보며) 니네 뛰어올 정도로 난자완스가 먹고 싶었어?
자훈: (복덕방에 들어와 앉으며) 어!
나 난자완스 한 번밖에 안 먹어봤잖아~ 또 먹고 싶어!
방 사장: 야~
아빠도 사실 그날 난자완스는 처음 먹어봤다~
자훈: 아빠도?
방 사장: 어~ 난자완스.
그렇게 큰 동그랑땡처럼 생긴 건지 몰랐어.
맛있더라. 술 한잔하기도~ 잠깐,
니네 이거 마시고 있어봐.
방 사장은 아이들에게 주스 팩에 빨대를 하나씩 꽂아 주었다.
그리고 뭔가 신나는 얼굴을 하고서는 전화를 걸었다.
“하 사장~ 오늘 저녁에 뭐 하나?
어어. 설희랑 자훈이가 갑자기 복덕방에 오더니 ‘난자 완스’를 시켜달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날 현수 일 있고... 회포도 못 풀었잖아.
자네 부부랑 우리 부부랑 애들이랑 해서.
복덕방에서 용용각 시켜서 고량주랑 해서 한잔하자고.
어어. 내가 시킬 테니깐. 얼른 와.”
방 사장은 최 무당에게 전화해서 복덕방으로 오라고 전화했다. 그리곤 콧노래를 부르며 안쪽 캐비닛에서 고량주를 꺼냈다.
종이컵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 사장: 니네...
아직도 손잡고 있니?
안 더워?
설희: 네?
자훈: 아~
#4
‘지이이잉’
거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설희는 덥석 전화를 받았다.
설희: 어!
자훈: (피곤한 목소리로) 미안.
이제 방에 들어와서, 혼자야.
설희: 어.
(미안한 듯) 콘서트는?
자훈: 그냥. 괜찮아.
현수는 무슨 일이야?
설희: 그게...
자훈: 무슨 일인데?
설희: 너, 그...
티본스테이크 일 기억나?
자훈: 어? 어.
기억나지. 잊을 수가 없지.
그 일은 왜?
설희: 자훈아.
우리 말고도 현수가 자기 기억을 남한테 빌려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자훈: 뭐라고?
그게 말이 돼?
설희: 좀 전에 현수를 만나고 왔는데, 오늘 엽서를 받았다며 보여주는 거야.
그 엽서에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이렇게 4글자만 적혀 있었어.
사진 찍어둔 거 보내줄게.
자훈: 어.
(사진을 보며) 이 엽서... 파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설희야, 잠깐만.
자훈이는 호텔 방의 스위트 룸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와 얼음을 꺼내서 자훈이는 자신의 커다란 텀블러에 얼음과 생수를 넣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엽서를 보고 나니 숨이 턱 막히고 열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못된 장난을 친 걸까?
장난이긴 한 걸까?
자훈: 근데 이거 이미지가 다 깨졌네?
설희: 어!
뭔가 확대한 것 같아.
신 할머니가 이 엽서가 좋은 소식이라고 하셨데.
자훈: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우리 아니면 거의 모를 것 같은 것만 적어 보냈네?
잘 쓴 정자체 글씨라 현수네 신 할머니가 보낸 건 아닌 거 같고.
발신인은 없네?
설희: 어. 없어.
엽서는 원래 발신인 안 적어도 보내줘.
자훈: 그렇구나.
현수가 그... ‘기억’에 관한 건 말했어?
설희: 아니.
얘기를 하려다가 말더라구.
알잖아? 현수 성격.
자훈: 내가 전화, 아!
오늘 만월이라서 현수가 못 왔지? 만월 도서관에 있겠구나!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다. 미안.
설희: 아니야.
단독 콘서트잖아. 일이 먼저지.
자훈: (짜증이 난 듯) 그래도.
하...
(마른세수를 하며) 나 낼모레 콘서트 끝나고, 서울에서 한 3일 정도 쉬어.
설희: 어.
자훈: 현수랑 한잔하면서 툭 터놓고 한번 말해볼게.
설희: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그렇긴 한데.
자훈아!
꽃분 이모가 저승 사서인데도, 기억 사건을 티본스테이크 파티하는 걸로 덮어버렸고.
그 이후로 현수가 귀신도 기억도 안 보게 돼서...
난 사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
우리가 아는 체를 하는 게 일을 더 키우는 걸지도 몰라.
자훈: 응.
니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솔직히 엽서가 좀 걱정돼서 현수랑 얘기하고 싶어.
너랑 나는, 그날 이후로 ‘기억’ 이야기를 우리끼리도 한 적이 없잖아?
현수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애도 아니고.
만월 도서관 분들이나 신 할머니도 현수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닐 분들이 아니셔.
설희: 그렇지.
그럼,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누군가가 현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거야?
자훈: 내 생각엔 그래.
현수가 자기 기억을 빌려줄 수 있다는 거.
그날 우리가 도서관에서 봤던 현수네 할머니, 홍란 할매, 꽃분 이모.
이분들 외엔 아마 너랑 나, 단둘만 알 거야.
설희: ... 하긴.
자훈: 설희야.
신 할머니가 좋은 소식이라고 하셨으면, 이 엽서에 적힌 건 현수 미래에 일어날 일 같아.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설희: 설마.
현수가 다시 자기 기억을 빌려주는...!
자훈: 설희야.
우린 현수의 전후 사정을 아니까 빌려주는 걸로 알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건 기억 조작이야!
지금 만월 도서관으로 가봐!
설희: 알았어.
또로록 딱!
뭔가 작은 게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불이 나갔다.
자훈: 어?
설희: 어?
천장에서 갑자기 떨어진 팥알에 제주도의 자훈이, 서울의 설희가 있는 곳의 불이 나갔다.
또로록 딱. 쿵!
한 번 더 팥알이 떨어지자, 자훈이와 설희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