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 관장은 난생처음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어젖힌 꽃분 이모가 저승으로 날아간 것도 놀랄 일인데 현수마저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오 관장에겐 망자들 앞에 서는 게 무척 큰일이다.
아까는 정말 태어나서 쓸 수 있는 모든 용기를 쥐어짠 것이었다.
사실 꽃분 이모는 매점 이모이기 이전에 만월 도서관에 실질적인 관장이다.
원래라면은 관장을 했었어야 할 꽃분 이모가 취미인 요리를 안식년에라도 원 없이 하고 싶다고 염라 대왕에게 졸랐다. 그래서 오 관장이 대신 관장을 한 것이다.
꽃분 이모: 염라대왕님!
안식년이라 안식을 하려면~ 당사자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야 안식 아닌가용?
나는 관장 같은 감투 싫어요~ 서류 작업이라면 이제 넌덜머리가 나~
도서관 매점 이모 시켜줘요.
아니~ 원하는 것도 못 하면 그게 무슨 안식이에요?
염라대왕: 꽃분 사자.
아무리 그래도 직급을 낮춰서 안식년을 가진 적은 없네.
다 그럴만한 인재를 가려서 자리를 앉히는 건데 이렇게 떼를 쓰면 어찌하누!
꽃분 이모: 내가 쓰는 서류 절반은 저기 저 ‘오씨 저승사자’가 쓰는 거니깐.
오 관장으로 감투 씌워서 만월 도서관 관리하고,
나는 매점 할께요~
네?
그래봐야 30년인데 내가 옆에서 잘 가르쳐 놓을께요.
나 진짜 안식년에는 제대로 안식하고 싶다니깐용~
염라대왕은 못 이기는 척 도서관 매점 이모를 하고 싶다는 꽃분의 원을 들어주었다.
사실 염라대왕은 자신의 다음 대를 이을 저승사자로 꽃분 이모를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자유에 가까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2
꽃분 이모는 딱 2년간만 만월 도서관의 관장과 매점 이모를 겸직했다.
오 관장이 ‘저승 사서’직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2년 후 오 관장은 초고속 승진으로 바로 만월 도서관의 관장이 되었다.
2년이란 시간은 ‘저승 사서’가 되기 위한 학습 시간이었다.
평생을 망자만 저승으로 이끈 저승사자들이 갑자기 이승에서 일하는 것이니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저승 사서들은 첫 2년 동안은 이승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쉬면서 학습한다.
첫 2년에, 저승 사서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은?
바로 산 사람들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하는 사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저승사자가 사서 교육에 합격하면 염라대왕은 저승 사서라는 직급을 하사했다.
가끔 재수하는 저승 사자도 있다.
이승에서 신나게 놀다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이었다.
저승 사서가 되면 전국의 도서관에 2명씩 배치되어 책에 잡귀가 붙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그 동네의 망자들을 관리하는 저승사자와 협력해서 이들을 만월 도서관으로 향하는 이층 버스에 타도록 돕는다.
이 모든 걸 이승의 자유를 만끽하며 천천히 배운다.
왜? 안식년이니깐!
만월 도서관의 관장 역할을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꽃분 이모가 아무나 관장 자리에 앉힌 것은 아니었다.
오 관장 이전에 오씨 저승사자일 때도 그는 일을 잘하기로 소문난 인재였다.
그가 조용한 걸 좋아하고, 내성적이지만 않았어도 꽃분 이모를 뛰어넘는 저승 사서가 되었을 것이다.
오 관장을 매우 아꼈던 꽃분 이모는 그가 하기 힘들어하는 대외적인 만월 도서관의 일을 대신 해주었다.
그런 그녀가 불쑥 만월 밤에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다니!
오 관장 입장에서는 난생처음 퇴사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야 임기응변이 튀어나왔지만,
임기응변으로 만월 밤을 오롯이 보낸다는 건 오 관장에겐 너무 벅찬 일이었다.
#3
만월 도서관은 전국에서 오직 하나뿐이다.
저승으로 바로 가지고 못하고 이승과 구천을 헤매는 망자들을 모아서 저승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오 관장은 망자들을 맞아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혼자서 이끄는 건 처음이었다.
꽃분 이모의 빈자리를 채우며 현수도 신경 챙기고 망자, 저승 사서, 저승사자를 이끌어야 한다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성적인 오 관장에겐 한계가 온 듯했다.
그때였다.
만월 도서관의 일 잘하기로 소문난 라이징 스타, 염사서가 나섰다.
염사서: (차분하게) 오 관장님, 제가 현수 씨랑 같이 있을게요.
여기는 제가 정리할 테니까 얼른 매점으로 가보세요.
난리가 났을 거예요.
오 관장: (마지못해) 그래... 염사서...
아! 오늘 아기 망자가 없으니, 현수랑 어린이실에 있어요.
염사서: 네! 관장님
홍란 할매한테, 상황 전해주시구요.
할매가 덕팔 삼촌과 춘봉 아재라도 불러서 망자들 먹는 거랑 씻는 거 해결 보실 거에요.
오 관장: 그... 그래 고마워. 염사서.
염사서는 누굴까?
성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사서는 일개 저승사자가 아니었다.
염라대왕의 혈족만 쓸 수 있는 게 염 씨다.
과거에는 염씨 혈족만이 염라대왕을 할 수 있었다.
요즘 저승은 다르다.
전대 염라대왕이 저승사자의 업적을 평가해서 30년에 한 번씩 자리를 물려주곤 했다.
염씨 성을 가진 염라대왕의 혈족인 저승사자가 두각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패밀리 비즈니스를 오래 보고 크면 아는 폭이 넓어지니...
하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저승사자가 염라대왕을 할 때도 많았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능력제였다.
그리고 꽃분 이모를 봐서도 알겠지만, 모든 저승사자가 탐내는 건 30년간 망자를 보지 않을 안식년이었지 염라대왕의 자리는 아니었다.
저승사자는 죽은 자들은 매일 보니 삼라만상의 이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일까?
유한한 시간을 살며 거기서 소소한 즐거움을 매일매일 누리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
그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특히나 금전적인 제약마저 없으니!
저승사자들 사이에서는 염씨 성의 저승사자들이 금수저로 부러움을 받는 이유가 있다면?
타고난 저승사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질투가 없는 것은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할 때 저승사자들이 2인 1조로 움직여서다.
망자마다 늘 조가 바뀌는 데 능력 좋은 염씨 성의 저승사자를 만나면 망자들의 만족도가 높아 인사고과가 좋아진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염씨 성을 가지 저승사자가 매우 적어서 활동을 오래 한 저승 사자도 자주 같은 조를 하지 못한다는 거다.
#4
오 관장이 지하로 내려가자, 염사서가 버스 쪽으로 갔다.
망자들이 더 있었다.
처음에 내린 망자들이 이승에 크게 미련이 없는 이들이라면?
기억을 잃어서 무기력한 망자들은 함께 온 그 동네 저승 사서들과 같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염사서는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어조로 인사를 했다.
“망자님, 저승 사서님!
환영합니다.
만월 도서관의 염사서입니다.
오늘 지하의 꽃분 매점은 오 관장님, 홍란 목욕탕은 홍란 할매가 관리하십니다.
가셔서 망자분들은 식사를 먼저 할지 목욕을 먼저 할지만 정해주시면 됩니다.
사서님들은 함께 온 망자분들을 전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쪽 중앙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저승 사서들의 ‘네’ 하는 응답 소리가 들렸다.
염사서는 저승 사서들이 무기력한 망자와 매점으로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민현수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이 중요하지만, 망자는 만월 도서관의 존재이유이니... 망자들이 먼저였다.
염사서: 현수씨? 어디쯤 있어요?
저승사자 4호: (버스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밀며) 염 사서님!
그 산 사람 청년 찾아요?
염사서: 네! 사자님.
저승사자 4호: 여기 운전석 쪽 땅에 누워 있어요.
저희는 망자들이 다 내리기 전까지 버스에 못 내려서 지켜보고만 있었어요.
염사서: 아.
그렇죠. 만월이니까요.
오 관장과 염사서가 만월의 일로 정신없는 동안 현수는 버스 옆에 누워서 호흡을 가다듬었었다.
현수도 만월이 망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염사서: 현수씨? 괜찮아요?
일어설 수 있어요?
이런 상황에 미안하지만, 꽃분 이모 지시대로 지금 바로 만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현수: 네...
염사서: 참! 만월에 도서관 안에선 핸드폰이 안 터져요.
혹시 연락해야 할 곳이 있으면 지금 하셔야 해요.
현수: 괜찮아요.
염 사서님 죄송해요.
만월 같은 중요한 날...
염사서: 아효, 아니에요.
염사서는 민현수를 부축해서 만월 도서관 안으로 향했다.
현수는 얼음장처럼 몸이 차가웠다. 그를 부축하던 염사서는 이 고운 산 사람 청년이 참 안타깝단 생각이 들었다.
깊게는 몰라도 말 못 할 사연이 얼마나 많으면 어린 나이에 이럴까, 싶었다.
염사서는 오 관장이 말해준 대로 도서관 1층에 마련된 어린이실 한켠으로 현수를 부축해서 들어갔다.
#5
도서관마다 다르지만 통 건물로 된 도서관은 여러 층마다 역할을 달리해서 운영한다.
보통 이런 도서관의 1층은 대부분 어린이 공간이 있다.
어린이 공간에는 작은 공간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아이들을 위해서 낮은 칸막이와 폭신한 매트가 있는, 어린이실이 있다.
염사서는 현수를 어린이실의 매트 위에 눕히듯 앉혔다.
따스한 불빛의 스탠드를 키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현수씨, 여기 잠깐만 있어요.
몸이 너무 차요.
따뜻한 차라도 내올 테니까 잠깐만 혼자 있어요.”
염사서는 어린이 공간을 나와서 문을 닫았다. 가벼운 묵념과 함께 주머니에서 자물쇠와 같이 생긴 저승패를 꺼내어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현수를 가둔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월 도서관이 생긴 이래로 꽃분 이모는 이렇게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이런 날은 설마가 사람잡는 날이 되기 십상이다!
미연의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염사서는 빠른 걸음으로 지하 매점으로 내려갔다.
현수는 염사서가 자리를 비운 그사이에 도서관 어플을 다시 켜뒀다.
꽃분 이모가 오기 전까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염사서가 매점에 내려가니 오 관장님이 작은 목소리를 애써 크게 말하는 게 보였다.
정리해 둔 연설 대본 노트를 보면서!
“망자님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만월 도서관의 오 관장입니다.
만월 도서관을 즐기는 순서를 설명하겠습니다.
우선은 꽃뿐 이모의 매점에서 식사하시고, 그다음에 홍란 할매가 있는 목욕탕에 가서 씻는 코스가 있고요.
먼저 씻고선 식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씻는 걸 먼저 하고 싶은 망자분은요.
여기 배식구 옆으로 보이는 문으로 저승 사서님과 함께 나가시면 바로 목욕탕입니다.
이 이후의 스케쥴은 망자분들이 먹고 씻는 걸 마치면, 또 설명드리겠습니다.
먹는 것과 씻는 것은 망자님들이 원하는 순서대로 하면 되는데요.
그래도 저희가 함께 따라가야 하니까, 손을 들어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씻는 걸 먼저 하고 싶으신 분은 모두 손을 들어주세요.
어휴, 꽤 많으시네요! 좋습니다.
이 문 앞에 서 있는 이 멋진 저승 사서님과 함께 홍란 목욕탕으로 입장해 주세요.
목욕 후에 먹고 싶은 걸 알려주시면, 이곳 매점에 만들어서 바로 목욕탕으로 보내드리니 편히 드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참! 홍란 목욕탕에서는 홍란 할매가 운영하는 슈퍼에서 바나나 우유, 야쿠르트, 커피 우유도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럼, 식사 먼저 하실 망자분들은 식판과 함께 배식구로 와주세요.”
그 모습을 보며 염사서는 ‘역시 꽃분 이모가 뽑은 오 관장님이다.’ 싶었다.
잠시 주저할 뿐 원체 일을 잘하는 분이라 꽃분 이모가 하던 것과는 달라도 막힘없이 술술 해내는 오 관장님이었다.
홍란 목욕탕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망자들과 저승 사서들이 어울려서 신나게 입장을 했다.
염사서는 오 관장과 잠시 눈인사를 나눈 뒤에 꽃분 이모가 주전자에 끓여 둔 따듯한 보리차를 크고 두툼한 머그잔에 가득 부어서 다시 1층으로 올라갔다.
#6
“(노크 소리) 똑똑.
현수씨, 저 염사서에요. 들어갈게요.”
안으로 들어온 염사서는 자리를 잡고 앉아 꽃분 이모표 따듯한 보리차를 현수에게 건네려 했다.
그 순간!
왠 종이 한 장이 허공에서 현수와 염사서 사이로 떨어졌다.
떨어진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민현수.
귀자를 오늘부로 만월 도서관의 기억을 빌려주는 사서, 기보(祈報) 사서로 임명함.
-염라대왕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