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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Jan 31. 2018

할머니, 우리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 좋겠어요

나를 가장 좋은 재료로 빚어주신 고마운 할머니께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사람을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가장 먼저 그려낼 테지만 나에게는 부모님 만큼이나 애틋한 할머니가 계신다. 나는 잊지 않고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곤 했지만 서른이 되고부터 할머니와의 통화 언저리에는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따라붙었다.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를 하는 일이 언제부터 고마워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 그 고맙다는 말과 함께 평생 감정 표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오신 할머니가 꺼내시는 '사랑한다'는 인사가 왜 그리 아픈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울산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는 언양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정 많은 부모님, 넉넉한 인심의 할머니 밑에서 자란 것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진 최고의 배경이었다. 덕분에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음식에 대한 편식 혹은 조금 깨끗하지 못한 공간에 대한 것들도 나는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으로 자랐다. 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장 위를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쥐라던지 할머니가 키우시던 약으로 쓰던 애벌레, 소똥을 거름으로 쓰던 밭의 풍경들 덕분에 자연스레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할머니가 사는 붉은덕이라는 마을 인근에는 과자를 파는 작은 구멍가게조차 없었지만 나는 자연과 맞닿아있는 할머니 집을 좋아했다. 주중엔 집에서 잠을 잤지만 주말이면 먹을거리를 챙겨 아빠에게 할머니 집에 데려다 달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할머니는 동이 틀 때부터 쉬지 않고 움직이셨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나 증조할머니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아침을 준비하셨고 봄이면 잡초를 뽑으러 여름이면 비료를 주러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으러 쉬지 않고 움직이시는 게 할머니의 일상이었다. 내가 지켜봐 온 서른몇 해동안 할머니는 한시도 쉬지 않으셨다. 해가 지고 저녁을 먹고 나면 9시 뉴스를 보며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비로소 잘 준비를 했다. 할머니가 도자기로 된 요강을 씻어 마루에 두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나는 그제야 불을 끄고 할머니와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내가 할머니와 같이 자는 일을 유난히 좋아한 것은 누워있는 할머니의 등 뒤로 평생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소녀를 느껴서였는지 몰랐다. 18살에 녹록지 않은 집에서 시집온 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느끼셨을지를 생각하다 보면 나는 할머니가 가여워 할머니의 거칠거칠하고 커다란 손을 잡고 잠이 들곤 했다.




 그 많은 자식들을 모두 잘 키워내신 후에도 행여 자식들에게 누가 될세라 할머니는 5일장이 열릴 때마다 시장에 나가 손수 키운 채소들을 가판대에 올려두고 파셨다. 어른이 된 내가 들기도 어려울 만큼 무거운 보자기들을 가득 움켜쥐고 동이 트기도 전에 장터로 향하는 할머니를 종종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마스크를 끼고도 쉽게 가시지 않던 추위에 맞서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의 자리는 이제 현대화된 시장에 의해 사라져 버렸지만 장터에 쭈그리고 앉아 물건을 파는 할머니와 거스름돈을 치를 때마다 이따금 등장하던 할머니 허리춤 속에 있는 마법의 돈 주머니를 바라보던 일을 지금껏 잊어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그렇게 어렵게 돈을 벌어 우리를 먹여 살리셨으니까.


 할머니의 손은 그 어떤 사람보다 두껍고 거칠었다. 18살부터 거친 흙을 만지며 살아온 할머니에게 자신을 돌볼 시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의 손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첫 아르바이트 비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갑을 사드렸다. 장갑은 거칠고 투박해진 할머니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으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 동안 할머니의 손은 그 모든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은 내 대학 등록금을 위해, 할아버지의 병원비를 위해 한 마리씩 팔려 갔다.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 친구들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낸 나의 이야기를 쉽게 믿지 못했지만 그것은 나에겐 여전히 자랑스럽고도 감사한 기억이다. 2년이 넘도록 병상에 계셨던 할아버지의 뒷바라지로 정작 본인의 옷 한 벌 마음 놓고 사 입지 못하셨던 할머니께 뒤늦은 취업과 함께 홍시빛의 고운 꼬까옷을 사드렸다. 그마저도 아껴 입으시느라 장롱 한편에 곱게 넣어두신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할머니가 그 고운 옷을 입고 더 많은 곳을 다니실 수 있도록 열심히 돈을 버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를 자주 생각하곤 한다.



결혼을 앞두고 할머니를 서울에 모셔 한복을 맞춰드리면서 그동안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고무장갑을 끼고 마당에서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일, 텃밭에 가는 할머니를 강아지처럼 따라가 함께 고구마를 캐던 일, 기다란 장대를 들고나가 할머니가 떨어트려주신 감과 이따금 장대 끝에 매달려 내려온 홍시를 입 안 가득 넣고 우물 거리던 일, 새벽같이 일어나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그 돈으로 함께 3000원짜리 칼국수를 사 먹던 일, 힘든 할머니 대신 집과 화장실 청소를 하던 나의 습관이 동네 가득 소문이나 갈 때마다 어른들의 칭찬을 듣던 일, 대구 사는 딸 집에 가고 싶어 하시던 할머니를 모시고 대구까지 짧은 여행을 갔던 일.





 이따금 먼저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할머니와 나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곤 한다. 살아가면서 언젠가 이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언제인지 모를 그 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져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평생을 주름진 손으로 추위와 맞서 싸우신 할머니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지만 나는 되려 할머니의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며 문득 평생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부모를 떠올렸다.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매사에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는 부자연스럽고도 당연하지 않은 일들을 말이다.


 할머니의 손목에는 언제나 제시간에 버스를 타기 위해 은색의 손목시계가 걸려 있었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가기 위해서는 하루 다섯 번 운행되는 315번의 버스를 타야 했다. 평생 시간이 흐르는 걸 보며 살아오신 할머니는 아마도 나의 시간과 할머니의 시간 사이에 있는 간극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너무 늦지 않게 할머니와 여행을 떠나야겠다. 해를 거듭하며 자꾸 야위어가는 할머니의 등을 더 많이 안아드리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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