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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Aug 29. 2018

가난을 팔아 월세를 냈다

우리에겐 반드시 겪어야 할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가난은 그 무게를 더했다. 

나의 짝꿍은 호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울의 작은 스타트업에 취업했다.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그 곳에서 그는 기존의 경력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인턴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서른살 그의 월급은 180만원, 그마저도 세금을 떼고나면 정작 수중에 남은 것은 없는 돈이었다.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서울의 집값은 거의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그는 밀리고 밀려 고시촌에서도 꽤 깊은 곳까지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고시원에서 겨우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이었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나는 일은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시집 갈 생각을 하라던 부모님의 말이 이 순간에 생각이 났던 건 그제서야 현실이 눈 앞에 아주 차갑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그는 나만큼이나 삶의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이었다. 집의 가장이었던 그는 모아둔 돈으로 어머니의 전세집을 구해드리고 본인의 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오늘 날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서울살이가 처음이었으니 고시원에서 시작을 하는 것은 조금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나 이미 1년 간의 고시원 경험이 있던 나는 고시원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서글퍼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유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보증금이 50만원 밖에 되지 않는 조건의 고시원은 서울 초년생인 그에게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속사정도 모른 채 그의 공간에서 머물러도 되는지를 물었다. 그는 조금 당황했지만 동생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이틀 정도 묵는 건 괜찮을 거라는 대답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이렇게 외로운 장소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나는 그저 들떠 있었다. 호주에서 들고 들어온 집채만한 캐리어와 배낭을 메고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서울대입구역에 내렸고 다시 한줄 서기를 해서 마을 버스를 탔다. 버스는 아담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을 태우는 능력이 있었다. 낯선 동네를 꼬불꼬불달리다 오르막길을 올라 커다란 교회 주차장 인근에 내리면 밖과의 온도차 때문에 유리창이 뿌옇게 된 국수집과 손님이 없는 미용실, 맛동산이나 뽀또같은 과자를 도로변에 내놓고 파는 구멍가게가 있었고 비탈길의 입구에는 낡은 세탁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탁소를 오른쪽에 끼고 돌면 제일 가파른 언덕 구간이 나타났다.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동안 그의 손은 빨갛게 얼어 버렸고 나도 그러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90년대 언저리를 떠올리게 하는 정말 작고 낡은 노란 장판을 가진 고시원 방이었다. 이 놀라운 공간이 한 층에 대 여섯개씩 존재하고 있고 이 건물은 다시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날 순대국밥을 먹고 그의 낡고 작은 공간에서 함께 잠을 잤다. 두 사람이 반듯하게 누울 수 없는 작은 침대였지만 옆으로 나란히 누워 잠들었던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내가 신대방역 언저리에 어렵게 집을 구하던 날, 나에게 모자란 돈을 보태준 것은 바로 그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500만원으로는 빛이 들어오는 집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회사에 찾아가 대신 돈을 빌렸다고 했다. 회사에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리고 또 혼자 서울대 입구역에 내려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월급과 매달 나가야하는 집값, 핸드폰비, 보험비 등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500만원을 갚는데만해도 십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우습게도 그 시절에 나는 자궁 수술을 해야만 했고 그 역시도 1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이 든다고 했다. 돈은 없는데 나갈 곳은 무척이나 많은 상황이 기가 막혀서 나는 자꾸만 슬프고도 화가 났다. 


 그로부터 몇 일 후, 평소 취미로 글을 쓰던 나를 잘 알고 있던 그는 부쩍 우울해 하는 나에게 에세이 공모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 콧물 모두 옷깃으로 훔쳐가며 글을 써내려 갔다. 집을 구하는 경험을 담아내는 공모전이었으니 나보다 더 구구절절하게 지질함을 묘사할 수 있는 이는 있을리 없었다. 더군다나 보이스피싱까지 당한 서른살 젊은 이가 음주 후 써내려간 애처로운 글은 취기가 올라 더욱 물 먹은 솜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나는 지질함을 앞세운 글 덕분에 공모전에서 1등을 했다. 


 벼랑의 끝에서 써내려간 글이 나에게 1년치 월세를 가져다 주었다. 500만원이 채 안되는 상금이었지만 나는 덕분에 회사에 빌린 돈을 일부 갚고 수술도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기적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처절한 결핍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생각보다 써먹을만 하다는 사실과 내가 나의 가난을 팔아 보증금을 벌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운명으로부터도 우리는 배운다. 

그것을 배우지 못한 인간만이 운명에 패배하는 법이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 소노 아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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